"달라진 것 없다"는 바이든에 한 방 먹인 北…"살라미식 인내심 시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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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아퀼리노 미국 인도태평양사령관 지명자. [AFP=연합뉴스]

존 아퀼리노 미국 인도태평양사령관 지명자. [AFP=연합뉴스]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쏜 24일(현지시간) 미국의 공식 반응은 인도태평양사령부를 통해 나왔다. 마이크 카프카 공보실장(대령)은 "오늘 아침 동해 상으로 발사된 북한 미사일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면서 "계속 상황을 주시할 것이며 동맹 및 파트너와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백악관과 국방부·국무부는 침묵하는 대신 한반도를 관할하는 지역 사령부가 나서 원론적인 입장만 내놓은 것이다.

'北 탄도 미사일 발사' 미 전문가들의 시각 #순항→탄도 미사일, 전형적 도발 수위 높이기 #트럼프가 용인한 단거리 미사일로 바이든 시험 #전략적 인내 진입 vs 북미 대화 촉진 가능성

앞서 지난 주말 북한이 순항 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사실이 미국 언론을 통해 알려졌을 때도 조 바이든 대통령은 "달라진 것은 없다"며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미 정부 고위 당국자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는 탄도미사일만 제재한다"고 언급했다. 그로부터 약 22시간 뒤 북한은 보란 듯 탄도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이런 반응에 대해 미국 내 전문가들은 충분히 예상됐던 상황이었던 만큼 '과잉 대응'으로 상대방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상대방의 반응을 봐가며 도발의 수위를 높이는 건 북한의 전형적인 '살라미 전술'이라는 것이다. 당장 바이든 행정부의 인식과 행동에 큰 변화가 생기지도 않을 것이란 게 이들의 진단이다. 하지만 북한이 행동을 개시한 만큼 도발의 수위는 높아질 수밖에 없고 바이든 행정부는 물론 한국 등 동맹국도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것이란 전망이다.

수미 테리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위원. [연합뉴스]

수미 테리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위원. [연합뉴스]

수미 테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순항 미사일 다음 탄도 미사일을 쏜 것은 상대 반응을 봐가며 단계적으로 강도를 높이는 전형적인 북한의 살라미 전략"이라며 "예상 가능했기에 전혀 놀랍지 않고, 오히려 새 정부 첫해 북한 도발 기록과 비교하면 다소 늦은 감마저 있다"고 했다.

다만, 미 정부 고위 당국자가 북한 미사일 시험을 경시하는 발언을 한 직후 북한이 도발 강도를 높이면서 미국이 체면을 구겼다는 평가도 있다. 익명을 원한 소식통은 "북한이 바로 다음 날 탄도미사일을 쏠 줄 알았다면 고위 당국자가 '탄도미사일이 아니어서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북한이 바이든 행정부의 허를 찔렀다"고 말했다.

켄 고스 미국 해군연구소(CNA) 국장. [중앙포토]

켄 고스 미국 해군연구소(CNA) 국장. [중앙포토]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는 바이든 행정부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한 정교한 설계의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켄 고스 CNA(해군분석센터) 국장은 "북한이 탄도미사일 시험을 단거리로 한 것은 트럼프 행정부가 설정한 한계점(threshold)이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유효한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단거리 탄도미사일 시험은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연구원.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연구원.

북한이 일단 행동을 시작한 만큼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전략도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는 지적도 나왔다.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이같은 평가를 하며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처럼 북한의 UN 결의안 위반 행위를 묵살하지 않고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2019년 26건, 2020년 3월 9건의 발사를 묵인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일과 함께 북한이 추가로 강도를 높여가며 도발할 경우 협상 가능성이 약화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고 유엔을 통해 규탄 성명을 내놓는 등 공동 대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북한의 도발은 마무리 단계에 있는 대북 정책 검토에 영향을 끼치고, 북한을 바이든 정책 우선순위로 올리기 위한 의도도 있다는 지적이다. "바이든 정책 우선순위에서 북한이 밀리는 모양새가 되자 대북 정책 검토 발표를 앞당기기 위해"(테리), "대북 정책 검토를 압박보다는 관여에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고스) 잇따른 도발에 나섰다는 것이다.

패트릭 크로닌 허드슨연구소 선임연구원

패트릭 크로닌 허드슨연구소 선임연구원

하지만 북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당장 미국의 대응에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패트릭 크로닌 허드슨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번 도발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무력 과시"라고 평가했다.

그는 "북한은 앞으로 몇 개월간 더 바이든을 시험하고 탐색하려 하겠지만, 결국 베이징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김정은의 판단이 변수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이 한반도 안정을 해치는 행동을 할 경우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이 끊길 수 있으므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베이징의 움직임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향후 미국을 시험하는 수위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과잉반응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고스 국장은 "북한은 바이든 행정부가 응답해야 한다고 압박을 느끼는 상황을 만들었고 이 상황에서 미국이 과잉반응하면 상황을 악화시키게 될 것"이라며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옵션이 많지 않거나 없기 때문에 북한이 던진 미끼를 물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향후 북한이 도발의 수위를 점차 높여나갈 것으로 예상했다. 클링너 선임연구원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나 또 다른 핵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런 사건들은 긴장을 증가시키고 바이든 행정부도 더 큰 도전을 맞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미국의 대응 방향에 대해선 전망이 다소 엇갈린다. 북미 대화 재개 관련해서는 결국 전략적 인내가 시작될 것이라는 의견과 대화가 촉진될 수 있다는 의견이 공존한다. 고스 국장은 "북한 도발이 북미 간 외교 기회를 앞당기지는 않을 것"이라며 "이름은 달리 붙이겠지만, 전략적 인내 같은 상황을 보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테리 선임연구원은 "미국은 국내 문제 등 우선해 봐야 할 정책이 산더미다. 북한 이슈가 수개월 이상 밀릴 수 있는 상황에서 이런 행동이 북한 쪽을 돌아보게 하고 대화를 촉진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맥스웰 민주주의수호재단(FDD) 선임 연구원.

데이비드 맥스웰 민주주의수호재단(FDD) 선임 연구원.

한국 정부를 향한 북핵 '보조 맞추기' 압력이 더 강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데이비드 맥스웰 민주주의수호재단 선임연구원은 "(미사일 발사를) 바이든 행정부가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 정권의 본성과 목표에 대해 순진한 가정을 그만하도록 설득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고스 국장은 "북한으로선 이동식 미사일을 예고 없이 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마음만 먹으면 한국과 일본의 감시를 벗어나 미사일 발사가 가능하다는 신호를 준 효과도 있다"면서 "한·미·일 동맹에는 더 큰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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