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읽기] 江南 남편이 못된 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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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안식처는 어디에 있을까. 결혼 생활 20년째인 A씨(49)는 요즈음 부쩍 이런 생각이 들면서 오색빛 단풍잎을 쳐다봐도 서글픈 마음뿐이다. A씨는 50을 바라보며 살얼음판을 걷듯 직장생활을 하는 이 시대 보통 아버지이자 남편이다.

별다른 연줄 없이 그간 주변 눈치보면서 모나지 않게 사느라 애쓴 덕분에 아직 일터를 지키고 있다. 물론 직장에서 화나는 일도 많았고 당장 사표 쓰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은 때도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참고 지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처.자식이다. 그런데 정작 가족들은 자신의 노고를 알아 주기는커녕, 나날이 질책만 많아지는 것 같다.

아내는 툭하면, 특히 동창회 같은 모임에 다녀온 날은 어김없이 친구나 이웃의 잘난 남편 이야기를 한바탕 늘어놓는다. '누구 남편은 수입이 이렇게 많다더라''누구는 남편과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더라'는 식이다.

반면 A씨는 지금의 생활만이라도 앞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가족들이 개인 공간을 가질 수 있는 강북의 새 아파트에 입주했을 때 얼마나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했던가. 그런데 가족들은 그게 아닌가 보다. 아내는 자신이 강남 아파트에 발을 못 붙이고 사는 처지를 한심해 한다.

아들이 명문대에 못간 것도 강남 8학군에 못 다닌 탓으로 돌린다. 결국 남편인 자신이 못난 죄로 가족이 행복하지 않다는 식이다.

물론 A씨는 아내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보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반박하기도 한다.

하지만 번번이 아내로부터 자기 변명만 늘어놓는 치졸한 사람으로 낙인 찍힌다. 아이들도 엄마 말에 동조하는 눈치다.

가정은 안식처라야 하는데, 오히려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우선 A씨는 가족들의 심리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도 무의식속에선 A씨의 말이 맞다는 걸 안다. 아내는 좀더 잘 살기 위해 힘들더라도 진작 생활전선에 뛰어들지 않은 자신이, 또 아들은 원하는 대학 진학을 위해 전력투구하지 않은 고등학교 시절이 후회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니 고통이 크다. 그래서 일단 자신의 문제를 부정(denial)한 뒤 남의 탓으로 돌리는 투사(projection) 심리가 발동하게 된다. 그래야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기전을 이해한 뒤엔 가장의 솔직한 느낌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오늘이라도 가족들에게 현재의 생활을 앞으로도 유지할 자신이 없다고 말해줘야 한다. 그래서 가족들도 지금 가진 것의 소중함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또 내가 아내나 처가 덕에 출세한 친구나 남의 집 잘난 아들 타령을 하는 가장이라면 그들의 심리가 어떨지에 대해서도 물어봐야 한다. 그래야 손쉽게 남의 탓으로 돌렸던 내 말이 상대방을 얼마나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가장이라는 이유로 성인인 아내와 성인이 된 자녀의 투정을 무작정 받아줄 수만은 없다. 또한 행복은 가장이 가져다 줄 수 없는, 스스로 찾고 발견하는 개인의 주관적 느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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