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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누가 제2의 추미애 신세 되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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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0년 세밑은 2019년의 마지막 날들과 비교하면 희망의 기운이 퍼져가고 있다. 검찰개혁이라는 거짓말로 권력 실세들의 범죄를 무죄로 만들려던 집권당의 시도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보다 무서운 게 사슴을 말이라 부르는 지록위마(指鹿爲馬) 바이러스다. 이 병에 걸리면 범죄 은폐를 검찰개혁이라고 부른다. 지록위마의 위세가 12월 들어 법원의 잇따른 판결에 의해 확 꺾였다. 국민적 희망은 여기서 생겼다. 윤석열 검찰총장을 직무에 복귀시킨 서울행정법원의 조미연·홍순욱 부장판사, 조국씨의 부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의 임정엽 부장판사에게 경의를 표한다. 판사들은 사슴을 사슴이라 하고, 말을 말이라고 했을 뿐인데 워낙 세상이 착란 상태이다 보니 당연한 호명조차 신기하게 다가왔다.

사슴을 말이라 불러야 했던 세상 #판사들 용기로 희망의 기운 퍼져 #추, 윤석열 몰아내려다 팽당해

코로나는 백신을 빨리 수입해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지록위마의 세상은 방역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벌거숭이 임금님한테 멋진 옷을 입었다고 칭송한다. 사회적 특수계급에 속하는 자들은 무슨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다. 보편적 상식이 지배하는 법치가 사라진다. 인치가 판치는 도둑님들의 소굴이다. 큰 도둑 잘 잡는 검찰은 개혁이란 이름으로 제거 대상이 된다. 권력에 꼬리치는 검사들만 살아남는다. 지록위마의 나라에서 자유로운 선거로 정권 교체가 일어나는 민주주의는 언감생심, 불가능에 가깝다. 2019년 말 범여 집권세력이 선거법·공수처법을 담합 통과시킬 때만 해도 조국과 그의 아내를 무죄로 만드는 슬픈 검찰개혁 즉, 지록위마의 세계가 곧 완성되는 줄 알았다.

1년이 지나 희망의 반전 드라마를 쓰게 된 계기는 검찰개혁의 사명감에 불타는 추미애 법무장관의 광기 어린 성정이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지나치면 모자람보다 못하다. 추미애가 자기만의 검찰개혁에 지나치게 용쓴 탓에 오히려 제동이 걸렸다. 국회 다수당이 배경인 행정부 폭력 앞에서 사법부의 온전한 정신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이로써 정권의 최종 목표인 지록위마 세상 만들기가 좌초했다. 대깨문이라 불리는 망상 집단이 배고픈 사자가 먹잇감을 찾듯 우는 소리를 내며 몰려 다니고 있으나 아무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한낱 거짓말과 정신 승리로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게 자명해졌기 때문이다.

추미애는 이해력이 부족했는지 처음부터 검찰개혁을 윤석열 찍어내기와 동일시했다. 그는 장관 취임 때부터 지금까지 큰 도둑 잡는 검사의 상징이었던 윤석열 총장을 쫓아내는 일에만 몰두했다. 윤 총장을 잡아들이기 위해서라면 없는 말도 지어내고 장기 수감 중인 사기범의 증언을 채택하기도 했다. 추미애가 조급한 안하무인격 언행이나 적법 절차를 제멋대로 무시하는 무법적 태도만 절제했어도 검찰개혁의 실체에 대한 국민적 의심이 눈덩이처럼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추미애의 마음속엔 문재인 대통령한테 잘 보여 총리 자리에 오르거나 서울시장 혹은 대권 후보에 나서보겠다는 정치적 동기가 깔려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추미애가 마주한 현실은 딱하게도 주인이 단물을 다 빨아먹고 버린 풍선껌 신세 비슷하다. 문 대통령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본인이 앞장서 그렇게 됐으니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사이 문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로 추락했다. 윤석열은 야권의 가장 강력한 대권 주자 자리에 올랐다. 민주당은 중도 지지층이 대거 이탈하면서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 전망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다. 여권의 총체적 위기가 추미애의 교만한 손길을 타고 들이닥쳤다. 문 대통령은 자칫 여권 사람들조차 그의 말을 안 듣는 비참한 레임덕을 맞을 수도 있다. 당장 시급한 건 차기 법무장관 임명 문제다. 대통령이 지록위마(윤석열 쫓아내기 검찰개혁)를 포기하지 않는 한 제정신을 갖춘 사람은 다 사양할 것이다. 누가 추미애처럼 풍선껌 신세가 되고 싶겠나.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