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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대통령 눈에만 보이는 터널의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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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출근길 버스 안에 걸린 포스터를 보고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지금 혼자가 되지 않으면 영원히 혼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아래 사진 속에는 인공호흡기를 꽂은 채 눈을 감은, 아마도 갓 숨을 거둔 듯한 남성이 누워 있다. 보건마스크와 인공호흡용 마스크를 쓴 모습을 나란히 대비한 사진 위에 “어느 마스크를 쓰시겠습니까. 남이 씌워줄 땐 늦습니다”라고 쓴 포스터도 봤다. 이건 캠페인이라기보다 국민을 상대로 한 겁박 아닌가. 하긴 위정자들의 안중에 국민은 가재·붕어·개구리일 뿐이니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섬뜩한 기분을 들게 하는 공포마케팅쯤이야 대수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대통령비서실장이 방역수칙을 어겼다고 국민을 ‘살인자’로 몰아세운 것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서 나왔을 터다. 이런 몰(沒)인권적 인식 앞에서 “우리가 이룬 민주주의와 인권의 성장이 K방역의 바탕이 됐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공허하게 흩어진다.

“K방역은 인권에 바탕” 자화자찬 #국제사회 안 통할 공허한 발언 #백신 놓친 책임은 누가 지나

거리두기를 축으로 하는 방역은 기본권에 대한 일정 정도의 제약을 전제로 한다. 그중에는 법에 규정된 것도 아니고 투표로 정한 것도 아니지만, 사회 구성원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가해지는 제약도 포함된다. 문제는 그 정도다. 어떤 나라에서는 마스크 쓰기를 강요하는 것조차 기본권 침해가 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굳이 겁박성 포스터를 안 붙여도 모든 국민이 알아서 마스크를 쓴다. 그뿐인가. 내가 어디 가서 뭘 했는지 고스란히 노출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QR코드를 찍고, 밤 9시 이후의 사생활은 반납하며 산다. 집회도, 예배도 올스톱이다. 그 대신 우리는 인구 대비 확진자 수를 줄이고 미국·유럽에서와 같은 대유행을 피해 버텨올 수 있었다.

성공은 딱 여기까지였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공동체 의식을 앞세운 국민들의 자발적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정부의 자화자찬은 좀 많이 나갔다. “대한민국이 방역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했다”며 K팝 한류 상품처럼 K방역을 수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화상 국제회의에 나선 대통령의 발언도 상당 부분 K방역 홍보, 즉 자화자찬에 할애됐다. 이런 방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멀리 나간 중국을 논외로 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 중에 우리나라와 같은 수준의 기본권 제약을 수용할 수 있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정부의 장담과 달리 K방역이 결코 세계의 표준이 될 수 없다고 보는 이유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성장이 K방역의 바탕이 됐다는 대통령의 발언에 국제사회가 동의할지는 더더욱 의문이다. 가뜩이나 대북전단살포금지법과 5·18왜곡처벌법 등이 차례로 통과되면서 국제사회는 한국의 인권 수준에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판국이다.

정부가 내세우는 K방역의 핵심은 검사(Test)-추적(Trace)-치료(Treat) 등 이른바 3T였다. 애초부터 3T만으로는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없다는 근본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여기에 올인한 결과가 뼈아프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최종병기가 백신이란 사실을 간과하거나 무시했다. 그 사이 3T는 3무가 됐다. 백신·병상·의료진이 없거나 태부족이란 얘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앞다퉈 공개 접종을 위해 TV 카메라 앞에서 소매를 걷어올리고 있다. 우리는 맞을래야 맞을 백신이 없다. 정부가 천문학적 돈을 들여 네 차례에 걸쳐 편성한 추경 예산에 백신 구입비 항목이 없었다는 보도 앞에선 할 말을 잃었다.

이쯤 되면 대통령은 깨끗이 실책을 인정하고 사후약방문이라도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대통령의 묵은 발언록을 들춰 보이며 책임을 장관들과 일선 부처에 떠넘겼다. 관료는 관료대로 앞뒤 안 맞는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이 모두가 국민은 안중에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 눈에 보인다던 터널의 끝이 국민에게는 아직 멀어 보인다. 을사년이 아닌데도 유난히 을씨년스러운 경자년 세밑이 이렇게 지나간다.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