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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인체 해부한 전유형

중앙일보

입력

임진왜란 때다. 충청도 청원 지역으로 진격하던 왜군이 초정리 근처 숯고개에 이르러 커다란 궤짝을 보게 됐다. 보물단지로 생각하고 궤짝을 부쉈더니 그 속에서 수천만 마리의 벌들이 쏟아져 나와 혼비백산했다.

얼마를 도망가다 다시 궤짝을 만났다. 이번에는 속지 않겠다며 궤짝을 열어보지도 않은 채 불을 질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통 안에 가득한 화약이 그만 폭발해 절반이 죽게 된 것이다.

다시 도주하던 왜병들이 얼마를 가니 또 다시 궤짝이 보이는 것이었다. 열 수도, 그렇다고 불태울 수도 없자 마을 사람을 잡아다가 무엇이 들었는지 물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모른다는 시늉뿐이었다.

한자를 쓸 줄 아는 왜병이 이 고을 사또가 누구인지 물었다. 마을 사람이 학송(鶴松) 전유형(全有亨)이라고 적자 왜병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기 바빴다.

조선에 쳐들어 올 때 '우송이패(遇松而敗)' 즉 '소나무를 만나면 패한다'는 말을 들었던 왜군들인지라 당시 현감 전유형의 호가 학송(鶴松)인 것을 보고 그대로 도주한 것이었다.

1594년 청원.증평 지역 현감이었던 전유형(1566~1624)은 이미 1592년 임란이 나자 조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듬해 왜군을 방어하는 책략 10여조 등을 올리는 등 국방에 힘썼던 인물이다. 때문에 이 같은 전설이 충청도 일대에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전유형은 의학에도 매우 조예가 깊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전염병, 즉 천연두를 치료하는데 그의 처방전이 널리 활용됐으며, 명의 허준(許浚)이 너무 늙어 궁중 병원이었던 내의원의 의원들을 가르칠 수 없자 조정에서 전유형을 초빙해 교육을 맡길 정도였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전유형은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무고를 받았고, 곧 죽임을 당했다. 그러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임란 당시 시체 세 구를 해부한 전유형이 그 벌을 받게 된 것이라는 말이다.

이 이야기는 17세기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 수록돼 전한다. 조선 최초의 해부학자 전유형이 시체 해부 기록 '오장도(五臟圖)'를 남겼지만 그 재앙으로 비명횡사했다는 것이다. 우리 최초의 해부학 서적이라 할 오장도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과연 전유형은 어떤 생각으로 인체를 절개했던 것인가?사실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인체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이때 '해부'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서양 의학의 원조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저술에는 뼈와 근육, 그리고 힘줄의 기능과 구조 등이 자세히의 탄생과 발달은 해부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반면 동양 의학은 장기의 기능적 측면을 중시했다. 해부학적 특질과 지식보다는 장기들의 상호 관련에 관심이 집중됐다. 이는 동양 의학론의 기저인 정(精).기(氣).혈(血)과 깊은 연관이 있다.

정(精)이 사람의 생명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서 일종의 에너지원 같은 것이라면, 정(精)을 담아 온몸을 순환하는 것이 혈(血)이며, 이때 발현되는 에너지가 바로 기(氣)였다.

안색을 통해 인체의 상태를 알 수 있는 동양 의학에서, 해부란 일종의 호기심에 불과한 것이었다.

조선 최초의 해부학자(?) 전유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달리 보면 모든 과학기술의 진보가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했던 것이니 전유형의 행동을 너무 나쁘게만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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