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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 18년 전 소설집이 美 '올해의 책 10' 선정된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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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전 소설집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가 올해 영문판으로 나오며 미국 출판계 최고 권위 서평지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2올해의 책 톱 10에 선정된 소설가 하성란. [중앙포토]

18년 전 소설집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가 올해 영문판으로 나오며 미국 출판계 최고 권위 서평지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2올해의 책 톱 10에 선정된 소설가 하성란. [중앙포토]

하성란(53) 작가의 2002년 소설집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의 영문판(제목 ‘Bluebeard’s First Wife’)이 미국 출판계 최고 권위 서평지인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올해의 책 톱 10(2020 Best Books Top 10)’에 선정됐다. 지난달 23일(현지 시간) 이 매체가 발표한 10권 명단에 퓰리처상 수상 극작가 아야드 아크타르의 신작 소설 등과 나란히 이름이 올랐다. “어둡고 이상하면서도 응집력 있는 다양한 이야기가 작가의 탁월함을 보여준다”는 선정평과 함께다. 하성란ㆍ권여선ㆍ배수아 등 한국문학작품을 20년 간 영미권에 소개해온 한국계 캐나다인 번역가 재닛 홍(40)이 직접 현지 출간 추진에 더해 번역까지 맡았고, 올 6월 미국 로체스터 대학 산하의 ‘오픈 레터 북스’에서 출판했다. 대산문화재단이 번역 지원했다.

하성란 소설집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美 저명 '퍼블리셔스 위클리' 올해의 책 톱10

‘퍼블리셔스 위클리 올해의 책 톱 10’에 한국문학이 선정된 건 이창래, 수잔 최 등 재미교포 작가의 영어소설을 제외하면 2016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이 작품이 모두다. 10일 하성란 작가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라며 담담한 소감을 밝혔다.

씨랜드 참사부터 경찰 총기 난사까지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영문판 표지. [사진 오픈레터 북스]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 영문판 표지. [사진 오픈레터 북스]

『푸른 수염…』은 씨랜드 화재 참사(‘별 모양 얼룩’), 시골 순경의 총기 난사(‘파리’), 인간 사냥(‘밤의 밀렵’), 성범죄(‘기쁘다 구주 오셨네’) 등 일상에 깃든 사회 문제를 장르적으로 비틀어낸 단편집이다. 국내 출간 당시 “미스터리적 요소와 컬트 영화적 감각을 주목할 만하다”(한기욱 문학평론가) 등 호평받았지만, 지금껏 1만5000부 판매에 그쳤다.

국내 출판계에선 이 책의 ‘톱10’ 선정에 대해 ‘사건’이란 반응이다. 하지만 이미 지난해 하 작가의 1999년 대표작 ‘곰팡이꽃’이 실린 『옆집 여자』(미국에선 ‘곰팡이꽃(Flowers of Mold)’이란 제목으로 출간)가 그의 소설집으론 처음 미국에 소개돼  ‘펜 아메리카 문학상’ 번역서 부문 예비후보에 오르며 미국 출판계에 작가의 이름을 알린 상황이었다. 신진 작가 발굴로 이름난 북미 최대 독립출판 전문 사이트 ‘북 라이엇’은 지난해『옆집 여자』를 ‘역대 최고 여성 작가 번역 단편소설 20선’에 꼽은 데 이어 『푸른 수염…』을 ‘2020 소규모 출판 기대작 30선’ ‘번역된 최고의 한국소설’ 등 수차례 기사로 다루는 등 현지 평단의 호응이 잇따랐다.

고전 동화 비튼 현대 가족 괴담 

『푸른 수염…』이 프랑스 작가 샤를르 페로의 ‘푸른 수염’ 등 서구에도 알려진 고전동화를 낯설게 변주한 점도 흥미를 끌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 ‘파우스트’를 현대 무대의 가족 괴담으로 재해석한 단편도 있다. 미국 공영 라디오 NPR은 “이 작품 속 주인공들의 탈진과 좌절은 하성란의 으스스한 필체와 맞물려 궁극적으로 우리의 세계가 어떤 동화처럼 어두울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한국계 작가 수잔 최는 “재닛 홍의 칼날처럼 반짝이는 번역”에도 공을 돌렸다. 하 작가도 “『푸른 수염…』이 시대차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마도 재닛씨가 지금 한창 살아있는 단어로 제 소설을 새로 쓴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면서 “한국문학의 (세계무대 속) 스펙트럼이 아직 좁은데, 번역 지원이 더 충분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미국의 권위 있는 문학 단체 펜아메리카는 지난해 현지 출간된 소설집 『곰팡이꽃』 에 주목하며 하성란 작가의 서면 인터뷰를 비중 있게 다뤘다. [펜 아메리카 홈페이지 캡처]

미국의 권위 있는 문학 단체 펜아메리카는 지난해 현지 출간된 소설집 『곰팡이꽃』 에 주목하며 하성란 작가의 서면 인터뷰를 비중 있게 다뤘다. [펜 아메리카 홈페이지 캡처]

칼날처럼 반짝이는 재닛 홍의 번역

두 살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간 재닛 홍은 대학시절 『옆집 여자』로 코리아 타임스 번역상 대상을 받으며 번역의 길로 들어섰다. 지난달 미국만화산업대표상인 하비상 최우수 국제도서 부문에서 수상한 김금숙 작가의 그래픽노블 『풀-살아있는 역사,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증언』도 재닛 홍이 영문판으로 번역했다.

하 작가의 소설집 두 편을 모두 현지 출간한 출판사 오픈 레터 북스의 존재감도 ‘톱10’ 선정에 기여한 요소로 꼽힌다. 번역 문학 분야에서 고정 독자층을 확보해온 이 출판사를 두고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지난해 런던북페어 기사에서 “오픈 레터의 출간물은 항상 언급하고 싶어진다”고 적기도 했다.

기생충·BTS·…한류 타이밍 맞았다

번역가 재닛 홍. [사진 대산문화재단]

번역가 재닛 홍. [사진 대산문화재단]

한편 재닛 홍은  e메일 인터뷰를 통해 “타이밍이 정말 중요하다”면서 한류열풍의 영향을 꼽았다. “최근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 BTS의 성공, 한식, K팝, K드라마로 한국은 지금 매우 인기가 있다”면서다. 그는 “이전에도『옆집 여자』 영문판을 내기 위해 출판사를 몇 번 찾았지만 조건이 맞지 않았다. 10년 전만 해도 지금만큼 한국문학에 관심 없었다”면서 “세계적으로 한국문학이 점점 더 관심을 받고 있음을 알고 확신이 있었을 때 오픈 레터에 직접 연락해 『옆집 여자』를 소개했고 출간 후 미국에서 호응을 얻으면서 자연스럽게 하성란 작가의 다음 작품을 출판하게 됐다”고 돌이켰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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