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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억 손해본 '아파트 루저', 나만의 풍경 품은 서촌 집주인 된 사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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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쫓는 모험' 저자 정성갑씨가 서울 종로구 누하동 자택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자신의 책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집을 쫓는 모험' 저자 정성갑씨가 서울 종로구 누하동 자택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자신의 책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국에서 아파트를 한 번이라도 판 사람은 ‘루저’잖아요. (값이) 계속 오르니까. 근데 여러 집을 모험해보니 집마다 각각의 즐거움이 있어요. 아파트에만 살았으면 억울할 뻔했죠.”

2005년 결혼해 15년간 자가‧전세를 오가며 여섯 번 이사 끝에 지난해 서울 서촌에 자신의 첫 집을 지은 정성갑(44)씨의 말이다. 잡지사에서 20년 가까이 에디터‧편집장을 거치며 여러 건축가를 인터뷰해온 그는 내게 꼭 맞는 집을 찾으려 아파트‧빌라‧한옥으로 “2년에 한 번 짐 싸면서 다이내믹한 세월”을 보낸 경험을 지난달 에세이집 『집을 쫓는 모험』(브레드)으로 펴냈다.

종로구 누하동에 있는 정성갑 작가 집. 그가 가장 좋아하는 3층 안방 창밖 풍경이다. "요즘은 아침 5시 반, 6시 되면 하늘이 빨갛게 차오르기 시작한다. 배화여대에 있는 300년 된 회화나무(사진)가 배경이 되니까 너무 예쁘다"고 그가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종로구 누하동에 있는 정성갑 작가 집. 그가 가장 좋아하는 3층 안방 창밖 풍경이다. "요즘은 아침 5시 반, 6시 되면 하늘이 빨갛게 차오르기 시작한다. 배화여대에 있는 300년 된 회화나무(사진)가 배경이 되니까 너무 예쁘다"고 그가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3일 그를 그의 서촌 집에서 만났다. 59.5㎡(18평) 작은 땅에 좁고 높게 지은 협소주택이다. 꼭대기인 3층 부엌 창문 너머로 배화여대의 300년 된 회화나무가 액자 그림처럼 내다보였다. 흐르는 구름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햇살 속에 단풍 낙엽이 비처럼 흩날렸다. “모든 단독주택은 멋진 풍경이 최소 두 군데는 나오는 것 같아요.” 이를 그는 “나만의 풍경”이라 표현했다.

신혼집부터 15년간 6번 이사다닌 정성갑씨 #서촌 집 짓고 쓴 에세이집 『집을 쫓는 모험』 #아파트값 손해 본 화병, 집 모험으로 전화위복 #"아파트에만 살았으면 억울할 뻔했죠"

아파트값 손해보고 화병 나기도

그런 정씨도 아파트값을 손해 봤다는 생각에 화병에 시달린 시기가 있었다. 신혼집이던 길음뉴타운의 첫 아파트를 팔아 1억원이란 큰돈을 처음 벌어보곤 2010년 인근의 두 번째 아파트 분양권을 3억6000만원에 무리해서 샀었다. 아파트 생활이 갑갑해 새 아파트를 세 놓고 서촌 한옥에서 전세살이를 하다 2014년 아파트를 처분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아파트 시세 정체기였다. 산다는 사람이 하도 없어 수천만 원 손해를 보고 팔았단다. 불과 몇 개월 후인 2015년부터 치솟기 시작한 아파트값은 지난해 10억원에 육박했다. 자칭 “아파트를 잘못 팔아 6억 넘게 잃은 눈물 나는 세월”이다.

목욕을 좋아하는 딸들을 위해 3층 부엌 한쪽엔 풍경과 하늘이 내다보이는 작은 욕조도 설치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목욕을 좋아하는 딸들을 위해 3층 부엌 한쪽엔 풍경과 하늘이 내다보이는 작은 욕조도 설치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크게 한 방 맞고 나니 깨끗이 단념하게 되더군요.” 한때 얼굴에 열꽃이 피어 잠도 못 잤던 그의 마음을 달래준 게 바로 집을 옮겨다닌 모험이다. 전남 무안의 마당 넓은 시골집에서 살던 유년시절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 그와, 신혼집부터 옥탑방에 차리자던 모험심 강한 아내는 이사하는 집마다 “마디마디 충실하게 예쁘게 해놓고 살았다”고 했다. 올해 초등학교 6학년‧2학년인 두 딸도 “허클베리 핀의 모험” 같은 이사의 여정을 놀이처럼 동참했다.

달 보고 제비 똥 치우는 한옥살이 또 꿈꿔

그가 집에 더 애착을 갖게 된 건 두 번의 한옥살이 경험 덕분이다. “마당에서 달 보고, 제비 똥 치우며 이야기가 쌓였죠. 아파트가 밀폐된 구조라 답답하다면, 한옥은 툇마루에 누워서 구름만 봐도 맑은 샘물이 채워지는 상쾌한 느낌이에요.” 그 순간들이 그리워 요즘은 한옥 짓는 꿈을 꾼다면서다.

집 뒤쪽 담쟁이덩굴이 단풍진 담벼락 아래서 책을 읽는 정성갑 작가를 반려 고양이 핀이 내다본다. 핀은 이 집을 지은 뒤 집 근처에서 아기 고양이 때 구조하며 키우게 됐다. 동물 키우는 건 생각도 못 했던 그가 집을 통해 겪은 또 다른 변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집 뒤쪽 담쟁이덩굴이 단풍진 담벼락 아래서 책을 읽는 정성갑 작가를 반려 고양이 핀이 내다본다. 핀은 이 집을 지은 뒤 집 근처에서 아기 고양이 때 구조하며 키우게 됐다. 동물 키우는 건 생각도 못 했던 그가 집을 통해 겪은 또 다른 변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파트 유일한 답 아니죠, 모험 나서길 

지난해 집을 지으면서 그에게는 또 다른 변화도 생겼다. 평생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콘텐트 제작 기획사를 차렸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하우스 토크’ ‘건축가의 집’ 등 집에 관한 토크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이번 책엔 협소주택 건축에 들어간 6억원의 내역에 더해 “집 지을 땐 전체 예산의 20% 정도를 여유 경비로 꼭 마련해두라” 등의 조언, 다양한 건축가 소개 등 집짓기에 관한 세세한 가이드도 담았다.
“요즘은 아파트를 유일한 답처럼 생각하잖아요. 많이 이사 다녀봐라, 집 짓는 것도 별 것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죠. 책을 읽은 분들이 다양한 집을 생각해보고 자기만의 집을 찾는 모험에 나서게 되면 좋겠습니다.”

집 곳곳에 그림 액자와 창문에 담긴 풍경이 어우러져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집 곳곳에 그림 액자와 창문에 담긴 풍경이 어우러져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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