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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숭숭 뚫린 재정준칙…나랏빚 폭증 문 정부 셀프 면죄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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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홍남기. [연합뉴스]

홍남기. [연합뉴스]

“현 정부의 재정 남용을 합리화한 조치에 불과하다.”(김동원 전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

국가채무비율 60% 재정준칙안 #2025년 도입, 책임조항도 안 둬 #재해·경제위기 등 예외규정 많아 #“빚 제동 건다며 재정 남용 합리화”

정부가 5일 내놓은 재정준칙에 대한 평가다. 나랏빚 증가 속도를 관리하고 불필요한 씀씀이를 줄이겠다고 만든 제도가 오히려 나랏돈 퍼붓기에 면죄부를 줬다. 정부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60% 이내로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예외 규정을 폭넓게 두고, 도입 시기도 다음 정부 때인 2025년으로 미뤘다. 나랏빚 관리 의무를 현 정권 스스로 면제했다.

기획재정부는 이날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방안’을 발표했다. 재정준칙은 나랏빚 폭주에 제동을 걸기 위한 제도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60%, 통합재정수지 적자 비율 3%를 기준선으로 정했다. 이 기준치를 넘어서면 한도 이내로 다시 내려갈 수 있도록 재정 건전화 대책을 의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가계·기업·국가가 진 빚 5000조 육박.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가계·기업·국가가 진 빚 5000조 육박.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올해 말 정부 추산 국가채무비율은 43.9%로 사상 처음 40%를 넘긴다. 증가 속도도 가파르다. 정부의 중기재정전망에 따르면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022년에 50%를 넘기고(51.2%), 2024년에는 58.6%가 된다. 현 상태로라면 2045년에 99.6%까지 치솟을 수 있다. 재정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수치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극복 과정에서 국가채무와 재정수지 악화를 고려할 때 재정 건전성 문제에 대한 대응은 중요한 어젠다”라고 말했다. 또 “저출산·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와 복지 성숙도 진전 등을 고려할 때 중장기적인 재정 건전성 관리와 재정 여력 축적이 긴요하다”고 도입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러나 정작 정부가 내놓은 재정준칙엔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기재부 설계대로라면 국가채무비율 60%, 통합재정수지 적자 비율 3% 수칙을 동시에 지키지 않아도 된다.

국가채무비율이 60% 아래면 통합재정수지 적자 비율이 3%보다 높아도 준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반대로 재정적자 비율이 3%보다 낮다면 채무비율이 60%를 웃돌아도 된다.

연도별 국가채무.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연도별 국가채무.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안일환 기재부 2차관은 “해외 국가는 채무준칙과 수지준칙을 각각 개별적으로 적용하는데 한국은 하나의 지표가 기준치를 초과하더라도 다른 지표가 기준치를 하회하면 기준에 충족하도록 상호 보완적으로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헐거운 기준에 더해 예외 규정도 광범위하다. 대규모 재해, 글로벌 경제위기, 전쟁 발생 시 한도 적용을 면제한다. 완화 요건도 있는데 상당 부분 정부의 자의적 판단에 맡긴다. 경기가 둔화하고 있다고 판단할 경우 통합재정수지 적자 기준을 4%로 올린다. 잠재성장률, 고용·생산지표가 판단의 근거가 된다. 홍 부총리는 “심각한 국가적 재난·위기 시 재정 역할이 제약받지 않도록 한다는 기조하에 검토했다”고 말했다.

예외·완화 규정이 많을수록 재정준칙의 실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안창남 강남대 경제세무학과 교수는 “정부가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예외라고 인정할 수 있는 여지를 지나치게 크게 뒀다”며 “급증하는 나랏빚 증가세를 제어하려면 예외 조건을 훨씬 엄격하게 둬야 한다”고 말했다.

시행 시기도 논란이다. 차기 정권인 2025년 회계연도부터다. “코로나19 상황이 여전히 지속하고 있고, 한도 준수를 위한 이행 기간이 필요한 점을 고려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바꿔 말하면 현 정부는 재정준칙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재정지출을 맘대로 늘릴 수 있다는 의미다.

김동원 전 교수는 “현 정부가 코로나19를 빌미로 채무비율 60%대까지 재정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확장 재정을 옹호하며 재정준칙 도입을 반대한 여권의 시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여당은 재정 확대에 족쇄 역할을 할 수 있는 재정준칙 도입에 반대해 왔다. 이에 정부가 실효성 있는 재정준칙을 내놓기 어려울 거라는 관측이 나왔고,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나 ‘면피용’이라는 지적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제시한 상한에 도달하면 해당 정부 임기 안에 회복하도록 하는 책임 조항이라도 둬야 다음 정부에 부담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행태가 없을 것”이라며 “책임이 없는 재정준칙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해외와 비교해도 ‘한국형 재정준칙’은 헐겁다. 독일은 가장 엄격한 재정준칙을 가졌다. 부채 신규 발행을 GDP 대비 0.35% 이하로 억제하는데, 이를 헌법에 못 박았다. 프랑스는 재정준칙을 법률로 둔다. 구조적 재정적자(경기 순환과 관계없이 유지되는 적자)를 GDP의 0.5% 이내로 유지한다.

이와 달리 한국은 채무비율 한도 등을 시행령으로 정하고 5년마다 재검토하기로 했다. 국회 심의나 의결 없이 정부가 알아서 국가채무비율 60%, 통합재정수지 적자 3% ‘룰’을 바꿀 수 있게 퇴로를 열어둔 것이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행령에 한도를 규정하는 건 결국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고쳐 쓰겠다는 것”이라며 “정권 차원에서 손볼 수 없는 지속 가능한 원칙을 만들기 위해선 법률에 채무비율 한도 등을 명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계+기업+국가 부채 5000조 육박…GDP의 2.6배

국가와 가계·기업 등 우리나라 경제주체가 지고 있는 빚은 지난해 4916조4000억원을 기록했다. 사상 최대다. 한국 경제가 지난해 벌어들인 돈(경상 국내총생산) 1919조원의 두 배(2.6배)가 넘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뜻이다. 이는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이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자료를 바탕으로 추산한 결과다. 가장 큰 부담은 정부가 진 빚이다. 국가책임채무는 지난해 2198조1000억원에 달했다. 이는 정부가 공식 발표하는 국가채무에 공공기관 부채, 연금 충당 부채를 더한 수치다. 결국 국민이 세금과 부담금으로 갚아야 할 돈이다. 다른 부문에서도 빚은 사상 최고치로 폭주 중이다. 지난해 가계신용(가계 빚)은 1600조3000억원을 기록했고, 기업 대출은 1118조원으로 늘었다.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정부 씀씀이, 낮은 금리, 경기 부진 등이 맞물리면서다.

세종=하남현·임성빈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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