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긴급진단] 흔들리는 의료정책 (하)

중앙일보

입력

건강보험 통합이 유예된 것은 당장 급한 불을 끈 것에 불과하다.

유예 기간이 끝나면 통합 여부를 두고 또 한바탕 소용돌이가 몰아칠 가능성이 크다. 건보 통합 문제는 1997~98년, 지난해 상반기, 올해 12월 등 5년 사이에 세번이나 논쟁을 일으켰다.

전문가들은 유예 기간 중 98년 이후 통합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 등을 냉철히 분석해 이번에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어느 쪽이 건보 재정 안정에 도움이 되는지, 의료 보장이라는 건강보험의 기능을 충실히 하는 데 어느 방안이 효율적인지를 명확히 하자는 것이다.

◇ 혼란의 원인=건보 통합 논란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의 보혁(保革)갈등이 짙게 배어 있다. 효율성(분리론)이냐, 사회 통합이냐에 대한 논쟁이다. 최근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자립형 사립고를 추진할 때 두 패로 갈렸던 양상과 유사하다.

통합은 잘 사는 사람이 못 사는 사람을 도와 사회 통합을 촉진하기 위한 개혁 차원에서 출발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98년 1월 국민과의 대화에서 "통합 의료보험 실시로 발생할 연간 1조원의 잉여금을 교육 재정에 쓰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명분과 현실은 달랐다. 잉여금은커녕 그 잉여금이 소진되고 올해 1조8천여억원의 적자가 쌓이게 됐다.

건국대 경제학과 김원식(金元植)교수는 "사회 통합을 위해 개혁해야 한다는 이념 아래 건보 통합이 출발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면서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환경을 무시하면 성공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효율성을 무시한 개혁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 중심 없는 정책이 혼란 부채질

=이번 논란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국회에서 빨리 결정해 달라"고만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그러면서도 복지부 주요 간부들은 "통합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라며 내심 분리를 바라고 있다. 이들은 누구보다 분리해야 할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밖으로 의견을 표시하지 않는다. 정치권의 결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여야가 정략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정부라도 중심을 잡아야 했다. 복지부 내부에서조차 "답답하다. 이 중요한 시점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한숨 소리가 흘러나온다.

◇ 유예 기간에 해야 할 일=이번 논란 과정에서 통합의 문제점이 종합적으로 드러났다. 통합의 전제조건인 자영업자 소득 파악률이 달라진 게 없고 직장과 지역 건보의 단일한 부과 기준 마련에 실패했다.

이 때문에 건보 가입자의 절반인 직장 가입자들이 손해를 본다는 뿌리 깊은 불신이 해소되지 않았다.

게다가 ▶직장조합의 도덕적 해이(적립금 까먹기와 건보료 안올리기)▶필요한 만큼 적기에 건보료를 올리지 못한 점 등 관리상의 어려움도 드러났다.

보건사회연구원 조재국(曺在國)보건의료연구실장은 "시행착오는 한 번으로 족하며 유예 기간 중 별 문제가 드러나지 않으면 굳이 통합할 이유가 없다"면서 "명분과 가능성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실효성을 확실하게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연세대 김한중(金漢中)보건대학원장은 "제3의 집단을 포함해 통합 논란과 관련된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화의 장을 만들고 여기에서 모든 문제점과 대안을 내놓고 토론해야 한다"면서 "정치력과 조정력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 건보 재정 안정이 관건=분리를 주장하는 직장 건보 노조는 "건보 재정이 파탄나지 않았으면 분리 주장을 꺼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재정 안정이 건보 운영의 핵심 과제다.

여야는 유예안을 최종 합의할 때 담배부담금(연간 6천6백억원)을 직장과 지역이 함께 쓰도록 한 건강증진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것으로 보인다.

복지부는 이 돈의 55%(3천6백여억원)를 직장 건보가 사용하면 적자를 상당액 메울 수 있다고 27일 분석했다.

그동안 재정 문제 때문에 복지부의 여러가지 정책이 오락가락했다. 지난해 7월 진료일수 제한(3백65일)을 무제한으로 풀었다가 내년 1월 다시 묶는다.

포괄수가제를 시행키로 했다가 원하는 의료기관만 하도록 바꿨다. 지난해 7월 원외 처방료를 신설했다가 1년 만에 없앴고 올 7월에는 진찰료를 내과.외과.기타계로 세분했다가 6개월 만에 다시 합치기로 했다.

담배부담금으로 급한 불은 끄게 됐으니 이제라도 철저한 분석을 통해 건보 재정대책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해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