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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 흔들리는 의료정책 (중)

중앙일보

입력

여야가 건강보험 재정 통합을 유예하기로 가닥을 잡은 것은 직장인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자영업자의 소득 파악률과 서로 다른 건보료 부과 기준 등의 문제 때문에 어느 정도 예측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건보 통합 문제는 다시 원점에서 논란을 빚을 전망이며, 통합을 위해 추진해온 각종 대책의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의약분업이 실패한 정책으로 결론난 마당에 국민의 정부 사회분야 2대 개혁과제 중 하나인 건보 통합마저 거의 원점으로 돌아감으로써 현 정부로선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됐다.

◇ 왜 유예했나=가장 큰 이유는 직장 건강보험과 지역 건강보험(자영업자.일용근로자 등이 가입)의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형평성 확보라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직장인의 소득 파악률은 1백%인 데 반해 지역 가입자는 30%에 불과하고 직장은 소득에, 지역은 재산과 자동차를 감안해 소득에 건보료를 부과한다.

1998년 12월 노사정위원회에서 건보 통합에 최종 합의할 때 단일한 건보료 부과 기준을 개발하고 소득 파악률을 높이는 게 통합의 전제조건이었다.

99년 2월 통합을 담은 건강보험법은 지역도 소득에 따라 건보료를 부과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보건사회연구원 용역 결과 지역 건보료 부과 기준 마련에 실패하자 지난 9월 국감 때 당시 차흥봉(車興奉)보건복지부 장관은 "(직장.지역간의) 형평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재정을 통합하기 어렵다는 것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헌법재판소도 이 문제를 지적했다. 헌재는 건보 통합에 합헌 결정을 내리면서도 "국가는 자영업자의 소득 파악률을 높이기 위한 모든 절차의 법적.제도적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부과 체계는 현행 지역 건보료 부과 기준을 약간 다듬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소득 파악률도 2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둘 다 실패한 것이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볼 때 건보 재정 통합은 본질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 문제점=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이번 법안 처리과정에서 유예-분리-통합을 계속 넘나들었다. 다만 현재 통합을 강행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점에는 어느 정도 의견일치를 봤다.

그래서 일단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유예 쪽을 선택한 것이다. 다분히 정략적인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모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영구적인 분리안이 미뤄진 점에 대해, 민주노총은 이번에 통합되지 않은 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들의 반발도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 지금과 크게 달라진 게 없고 결론이 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통합과 분리의 논란이 다시 본격화하면서 또 한차례 홍역을 치를 전망이다.

◇ 건보 재정 대책 수정 불가피=지난 5월과 10월 복지부가 만든 건보 재정 대책은 재정 통합을 전제로 한 것이다.

지역은 전체 재정의 40%를 국고에서 보조하기로 함으로써 내년 또는 2003년에 흑자로 전환하지만 직장은 올해 1조1천여억원의 적자가 나 적자액이 계속 늘게 된다.

이 적자를 지역에서 남는 돈으로 메워 2006년 흑자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유예기간에 지역이 직장에 돈을 빌려줄 수 있을 뿐 같이 사용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흑자 실현 목표는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당초 재정 통합에 맞춰 2002~2006년 매년 8~9%의 건보료를 직장과 지역이 같이 올리기로 돼 있으나 2003년부터 직장 건보료 인상률이 지역보다 높을 가능성이 크다.

◇ 과제=자영업자의 소득 파악률을 높이면 단일 부과 체계를 만들기 쉬워져 재정 통합 쪽으로 가닥을 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상 소득 파악률을 올리는 것은 한계가 있다. 90년대 초반 23%이던 게 현재는 30% 정도다.

따라서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이번 기회에 건보 통합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이규식 교수는 "지금까지의 통합 과정에서 건보료를 올리기 힘들고 재정도 부실해지는 등의 시행착오를 겪었다"면서 "이제는 과연 통합이 능사인지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소득 재분배 기능은 건강보험이 아니라 조세로 풀 수 있고▶건보 가입자의 절반이상이 손해를 본다며 통합에 반대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李교수는 이를 위해 여야가 국회 내에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명확한 결론을 내는 방안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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