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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미래를 기억하는 사회, 칼럼이란 무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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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쳔 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쳔 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칼럼의 홍수 시대다. 도처에 칼럼이 넘쳐난다. 그런데 칼럼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칼럼을 칼럼이게 하는가. 칼럼의 의미와 과제는 무엇인가. ‘뿌리 질문(root question)’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방식의 질문하기는, 특정한 주제에 대하여 사전이 주는 단순성을 넘어서서 복합적 시각을 가지게 한다. ‘뿌리 질문’에는 ‘예, 아니오’와 같은 단순한 답이 불가능하다. 단순하게 생각했던 특정 주제가 지닌 복합성을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뿌리 질문은 심오한 사유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칼럼에 대하여 다층적인 ‘뿌리 질문’을 하는 것은, 도처에 등장하는 칼럼의 사회적 기능은 물론 그 책임과 과제를 새롭게 조명하는 데에 필요한 인식 확장의 장치로 기능한다.

인식확장을 위한 뿌리질문 해야 #칼럼은 지식생산의 공간 #자유·평등·정의의 확장을 위하여 #미래를 기억하는 사회만이 희망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칼럼이란 “특정한 저자가 특정한 주제에 대하여 정기적으로 신문이나 잡지에 쓰는 글”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전적 정의가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별로 없다. 외형만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칼럼의 내부 세계를 알고 싶다면, 뿌리 질문을 하여야 한다. 새로운 통찰은 ‘사전-너머의 세계’에 치열하게 개입함으로써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 지면에 칼럼을 시작하면서, ‘칼럼이란 무엇인가’라는 뿌리 질문과 마주한다. 뿌리 질문을 통해서 칼럼의 사회적 의미와 그 과제를 재구성하고자 함이다.

칼럼은 사회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권력 공간’이다. 한 사회에서 지식 생산 과정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다. ‘칼럼 권력’을 지닌 이는 한 사회에 등장하는 무수한 주제 중에서 특정한 주제를 골라서 ‘중요한 것’으로 제시하는 선택권을 가진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인간관·세계관·정치관 등을 반영하면서, 그 특정 주제에 대한 지식을 생산한다. 이러한 지식 생산의 칼럼 권력을 가지는 사람은 뿌리 질문을 하여야 한다. 나는 ‘어떠한 지식’을 생산하는가. 그 지식은 ‘누구의 이득’을 확장하는 데 기여할 것인가. 또한 그 지식은 어떠한 미래 사회를 지향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며, 절대화할 수 있는 답이란 없다. ‘나에게’ 칼럼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첫째, 칼럼 권력을 지닌 이는 ‘주변부에 머무는 비판자’가 되어야 한다. 정치·경제·교육·문화·종교 등 한 사회를 구성하는 권력이 집중된 중심부와 ‘비판적 거리 두기’를 해야 한다. 중심부와 주변부라는 다층적 축을 늘 동시적으로 보아야만, 우리가 어떠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가를 짚어낼 수 있다. 여기서 중심부·주변부라는 두 축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언제나 특정 정황과 연계되어 있다. 한 사람이 어떤 정황에서는 중심부가, 또 다른 정황에서는 주변부가 되기도 한다. 특정한 주제에 대한 복합적 조명이 언제나 필요한 이유이다.

둘째, 지식 생산 공간으로서의 칼럼은 특정한 부류의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유·평등·정의의 확장을 위한 지식을 창출하는 과제를 지닌다. ‘모든’ 이란 추상적 의미가 아니다. 개별성을 지닌 구체적인 개인들이다. 그 어떤 근거에 의해서도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다층적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는 개별인들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 정의로운 사회를 모색해야 한다. 칼럼은 이러한 인식 확장을 위한 지식을 담아내야 한다. 칼럼을 쓰는 이들이 현대사회의 다양한 차별과 배제 문제에 대한 복합적 이해를 지속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이유이다.

셋째, 칼럼은 ‘대변의 공간’이다. 어떠한 사람들을, 어떠한 가치를, 어떠한 세계를, 그리고 어떠한 미래 사회를 대변할 것인가. 칼럼의 저자와 독자가 씨름해야 할 책임적 과제이다.

넷째, 칼럼은 ‘설득의 공간’이다. 칼럼은 특정인 또는 특정 집단의 권력 비호나 확장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젠더, 인종, 계층, 학력, 장애, 성적 지향, 국적, 종교 등 그 어떤 조건에 의해서 그 어느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평등사회를 만들기 위한 가치에 동조하도록, 사회 구성원들을 설득하는 공간이다. 그 설득의 공간은 사회 구성원들이 ‘변혁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초대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

다섯째, 칼럼은 ‘미래를 기억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의 세계’에 치열하게 개입하면서, 우리 사회가 일구어 나가야 할 ‘도래하는 세계’를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인간의 자유, 평등, 정의, 연대의 의미가 제도화되고 확산되는 세계는 ‘아직 아닌 세계’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다가올 미래를 기억하는 소수들에 의해서 그 평등과 정의의 원이 확산되어왔다. 미래를 기억하는 사회만이 희망이 있다. 미래에 대한 기억은 현재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변혁에의 열정을 살아나게 하기 때문이다. 칼럼의 막중한 사회적 책임이다.

한 편의 칼럼이 보여주고 담아내고자 하는 미래 사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지금의 세계’와 ‘다가올 세계’ 사이에서 비판적 성찰의 끈을 놓지 말고, 미래 세계를 기억하면서 지금 세계에 개입하는 것, 칼럼의 필자·독자 모두의 과제이다.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쳔 대학교·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