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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증후군

중앙일보

입력

카지노, 복권, 경마, 경륜, 빠찡코.... 한바탕 돈벼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충혈된 눈으로 도박장을 서성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도박장을 찾지만 늘상 허탈한 마음을 앉고 문을 나선다. 늘상 반복되는 손해, 그런데도 왜 이들은 오지도 않을 대박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할까?

중독상태에 빠지면 불행히도 같은 흥분을 얻기 위해서는 도박에 거는 돈의 액수가 점점 더 커져야 한다. 이걸 내성이라고 한다. 도박중독자들에 나타나는 특징적 증상이다. 이 때문에 빚이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만다. 이젠 왠만한 액수에는 눈도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또 다른 한가지 특징이 금단증상이다. 대부분의 도박꾼들이 어느 순간 자신에게 문제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야 이거 이러다간 큰일 나겠다, 이제 그만 해야지, 이런 결심을 안 해본 중독자는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끝난다. 바로 금단증상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도박중독자의 비율은 전 인구의 1-2%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나라와 지역에 따라 큰 편차를 보인다. 호주와 같이 도박이 합법적인 경우는 월등히 높은 6-7%나 된다. 쉽게 접근이 가능할수록 중독자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성인의 약 4.1%가 도박중독 증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경마, 경륜 등의 합법적 도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시내 곳곳에 불법 도박장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한해동안 검거된 도박사범만도 무려 3만 4천명이나 된다.

그래도 이건 빙산의 일각이다.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선 특별 대우를 받는 한국인이 수도 없이 많다고 하니 국제적인 봉인 셈이다. 이젠 국내를 넘어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또 한가지 걱정은 바로 사이버 도박이다. 참 살기 좋은 세상이다. 이건 멀리 갈 것도 없다. 그저 손가락만 있으면 된다. 시도 때도 없이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컴퓨터만 켜면 된다. 온라인 도박을 통해 외국으로 빠져 나가는 돈이 수억에 이른다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그동안 비교적 중독과는 거리가 있었던 여성들과 청소년들이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이 더 큰 골치거리다.

도박으로 인한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파산, 실직, 이혼은 물론이거니와 자살율도 20%나 된다. 도박의 도시 라스베가스에서는 매년 1000명 이상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고 하니 도박의 도시가 아니라 자살의 도시인 셈이다. 도박은 중독자 자신과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 절도죄의 35%, 비폭력 범죄의 40%가 도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미국에서 한해에 도박으로 사라지는 돈이 500억 달러나 된다고 한다. 그저 천문학적 숫자에 입이 벌어질 뿐이다.

이처럼 심각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도박중독에 빠지는 것일까? 왜 똑같이 도박을 해도 누구는 중독에 빠지고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일까? 정답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심리적인 요인, 환경적인 요인, 성격과 타고나는 요인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최근의 여러 가지 연구들은 중독이 단순한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질병임을 밝혀주고 있다. 도박중독뿐 아니라 알코올, 약물, 마약중독과 일종의 현대병이라고 할 수 있는 쇼핑중독, 사이버중독 등이 모두 같은 원인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쾌락, 충동과 연관이 있는 질병이다.

인간의 뇌에는 충동을 담당하는 회로가 있다. 이 회로가 선천적으로 부실하거나 어릴때부터 잘못 형성된 경우 쉽게 중독에 빠진다는 설명이다. 이 사람이 술을 마시면 알코올 중독, 도박을 하면 도박중독에 걸릴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다. 쾌락을 담당하는 뇌는 특정한 자극이 들어오면 다량의 쾌락물질을 분비하고 다시 더 강력한 자극을 찾게되는 것이다. 이 회로에는 도파민을 비롯한 여러 신경전달물질이 작용하는데 너무 많거나 적거나 불균형을 이루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도박중독은 더 이상 마음이나 의지의 병이 아닌 뇌의 병, 즉 뇌기능장애인 셈이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중독자들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임상에서는 크게 세 부류의 도박중독자들을 만나게 된다. 첫째는 스릴을 추구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뭔가 새로운 자극, 좀 더 강렬한 자극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도박뿐 아니라 쉽게 여러 종류의 중독에 빠지곤 한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아나서는 탐닉형 환자들이다.

또 외래에서 흔히 만나는 중독자들은 현실도피적인 사람들이다. 대개 내성적이고 조용하다. 함께 따라온 가족들이 진료실에서 그렇게 구박을 주어도 묵묵히 듣기만 한다. 화라도 낼 법도 한데 고개를 숙이고 조용하기만 하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세상 재미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친구도 별로 없고 사회활동도 취미도 거의 없다. 이런 사람에게 도박이란 일시적인 항우울제라고 할 수 있다. 효과가 너무 짧고 치뤄야 할 대가가 큰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대박을 부추기는 사회환경도 도박꾼들을 양산하는데 일조를 한다. 일확천금의 꿈을 부추기는 교묘한 상술, 황금만능주의, 잘못된 부모들의 양육태도도 문제다. 모든 책임이 일차적으로 본인에게 있음은 말 할 필요도 없지만 이를 부추기는 우리의 환경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 정선의 카지노 이 후 각 지자체 마다 수익성을 내세워 카지노나 경마장 등을 유치하기에 여념이 없다.

도박중독은 치료가 안된다. 불치의 병이다. 흔히 보통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불행히도 그동안 도박중독은 정신질환으로서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정신과의사들로부터도 소외되어 왔던 병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쉽지는 않지만 얼마든지 치료될 수 있는 병이다. 의학의 발달로 원인이 속속 밝혀지고 있고 많은 치료법이 개발되었다. 약물치료 부분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부 항우울제가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알코올 중독에 쓰이는 일부 약물이 도박에 대한 욕구와 갈망을 현저히 줄여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다른 질병도 마찬가지지만 조기에 치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중독의 기간이 길어지게 되면 인격적으로도 황폐화가 일어나게 된다. 모든 것을 잃고 거의 자포자기 상태다. 이런 경우 치료가 되어 다시 사회로 복귀하는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조기치료를 위해서는 본인은 물론이지만 가족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도박으로 인해 회사생활이나 가정생활에 문제가 일어날 정도면 가족들이 이걸 병으로 인식해야 된다. 미국의 도박 클리닉에서 가장 부러웠던 점이 바로 이 점이었다.

대부분의 중독자들이 정말 멀쩡한 상태에서 제발로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우리의 경우 갈 데까지 가야 겨우 가족들이 끌고 온다.

속고 또 속는다.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중독자의 뒤엔 늘 마음씨 좋은 아내나 너그로운 어머니가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빚을 갚아준다. 충분히 이해는 간다.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이건 마치 마약 중독자에게 마약을 주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 재미있는 도박을 돈까지 대어주니 어느 누가 그만둘 수 있겠는가? 자식에 대한 애처로움이, 남편에 대한 사랑이 자칫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처음부터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 이게 모두를 위하는 길이다.

[출처] 2001년 정신건강의 날 기념 중독없는 사회행사 - 일반시민 및 교사를 위한 특강 및 워크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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