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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를 수확할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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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올리브는 수천 년 동안 지중해 연안 주민들과 고락을 함께해 왔다. 열매를 기름이나 소금에 절여 먹는 것은 물론 기름을 짜는 데도 쓴다. 스페인.그리스 같은 남부 유럽에서 레바논.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이르는 근동 지역까지 올리브는 지금도 가장 중요한 농작물이다. 올리브유는 주요 수출 농산물이기도 하다. 이렇듯 요긴한 환금 작물인 만큼 올리브는 중근동에서 부와 번영, 나아가 평화의 상징으로 통한다. 패권경쟁으로 수천 년 피에 얼룩진 중동이지만 일손이 많이 필요한 올리브 수확철엔 싸움조차 자제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올해 레바논 남부에선 올리브를 수확할 수 없다. 수천 발의 포탄과 미사일이 올리브 밭을 갈아 엎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 새벽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민간인 60여 명이 사망한 카나 마을이 대표적이다.

이스라엘 쪽도 마찬가지다. 레바논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발사한 수백 발의 카추사 로켓으로 건물과 함께 올리브 농장도 망가졌다. 레바논과 이스라엘 국경 양측 모두에서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해 이제 막 새끼손가락 끝마디만하게 열리기 시작한 올리브 열매를 가꿀 사람도 없다.

'평화의 상징'을 수확하기는 더 어려운 상황이다. 상호 입장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항구적 평화안'이라는 올리브를 수확하려 한다. '테러리스트'의 위협을 제거하고 중동에 민주화를 정착시켜야 장기적인 평화가 가능하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이끌어 내려고 유럽을 설득하고 있다. 헤즈볼라의 무장 해제를 위해 다국적 평화유지군을 레바논 남부에 파병하고 이스라엘과의 국경 근처에 완충지대를 만드는 것이 골자다.

반면 레바논을 포함한 아랍권은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를 명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평화안에 불만이다.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는 이미 1967년 채택한 유엔 안보리 결의에서 규정하고 있다. 헤즈볼라는 '점령군에 대한 공격은 합법'이라는 국제법 규정을 내세워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다.

안보리가 조만간 휴전을 위한 결의안을 마련한다 해도 근본적인 사태 해결은 쉽지 않다. 기독교와 수니.시아파 이슬람 등 종파 간 알력과 갈등이 심한 레바논은 어떤 결정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레바논 정부군이 국제평화유지군으로 참여하면 헤즈볼라가 이들과 내전을 벌일 가능성도 있다. 레바논 정부는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중동 평화안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입장이다.

이스라엘도 헤즈볼라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목표에서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레바논 헤즈볼라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제거를 임기 내 마지막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게 아랍 측 시각이다.

이스라엘도 이번만큼은 중동에서 테러 위협을 확실히 제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미 이라크 정권이 무너졌고, 시리아와 이란은 각각 테러와 핵 개발 문제로 곤경에 처해 있다. 헤즈볼라를 무력화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내 저항단체들을 섬멸한다면 이스라엘의 안보가 상당 부분 확보된다.

지금으로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주장하는 항구적 평화안이 '포괄적'이 되는 것이 유일한 대안으로 보인다. 헤즈볼라와 팔레스타인이 이미 수차례 "점령지가 반환되면 무기를 내려놓겠다"는 입장을 밝혀 왔기 때문이다. 국제사회가 이번만큼은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뿌리가 썩은 올리브 나무에선 평화의 열매가 제대로 맺힐 수 없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힘으로 '일방적인 평화안'을 강요하지도, 이에 반발해 폭력의 악순환이 벌어지지도 않기를 바란다.

베이루트에서·서정민 카이로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