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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람사전

가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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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철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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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 정직, 믿음처럼 벽에 달라붙은 가훈은 죽은 가훈. 살아 있는 가훈은 벽에서 떨어져 나와 안방을 거실을 걸어 다닌다. 아버지가 사는 모습. 어머니가 사는 모습. 이것이 진정한 가훈.

『사람사전』은 ‘가훈’을 이렇게 풀었다. 우리 집엔 가훈이 없다. 가훈 정하는 일은 책 한 권 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니까. 먼저 ‘가훈선정위원회’를 만들어야겠지. 가족 모두는 당연직 위원이 되겠지. 따로 외부 위원을 모실지 말지 토론해야겠지. 위원장 선출은 쉽지 않겠지. 가장이 위원장이어야 한다는 비민주적인 발언은 본전도 못 찾겠지. 단어 하나로 가자, 한 문장으로 가자 의견도 분분하겠지. 선정된 가훈을 벽에 걸지, 마음에 새길지 격론도 벌여야겠지. 한 번 가훈을 평생 가훈으로 임명할지, 해마다 새 가훈을 모실지 고민도 해야겠지. 가훈을 어겼을 때 내릴 엄벌도 준비해야겠지. 모두 지치겠지. 다들 지겹겠지. 가훈을 포기하자는 의견이 나오겠지. 그동안의 수고가 아깝다는 반론도 나오겠지. 결국 가훈은 이렇게 정해지겠지. 가훈에 집착하지 말자.

가훈

가훈

나는 어릴 때부터 가훈, 급훈, 교훈, 사훈 같은 것들이 짓고 있는 그 근엄한 표정이 우스웠다. 단 한 번도 그들의 명령에 따라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 없다. 그들은 나를 압박하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했다. 그래, 문장 하나가 구성원 모두의 삶을 규정할 수는 없는 일. 통제할 수도 없는 일. 모두가 생각을 이렇게 바꾼다면 가훈은 없어도 되지 않을까. 내가 가훈이다. 내 뒷모습이 가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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