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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세계 경제 전망

미·중 패권 전쟁도, 한국 경제 운명도 빅 테크에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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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갈수록 커지는 빅 테크의 위력과 그림자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최근 폴크스바겐 최고경영자(CEO)에서 물러난 헤르베르트 디스(Herbert Diess)는 올해 초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지금 상태가 계속되면, 독일의 전통적 자동차 기업은 또 하나의 노키아가 되는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하드웨어 제품만 팔고 있다가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위기감을 토로했다. 소프트웨어 기업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를 바로 치고 들어가 중개자 역할을 하게 되면서다. 여기에 대처하지 않으면 독일 기업들은 ‘한때 잘나가던 조립회사’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다. 그 희생양은 독일이 잘하는 기계 제작, 화학 업종까지 거론되고 있다.

플랫폼이 연결한 ‘네트국가’ 등장 #애플 시가총액>독일 30개 간판기업 #미·중 패권전쟁에서도 결정적 변수 #코로나 사태 계기로 위력 더 강해져

독일이 어떤 나라인가. 유럽연합(EU)의 주력 성장엔진이자, 세계 4위 규모 경제력을 가진 경제 강국이다. 하지만 독일의 간판 기업(DAX30 종목)을 몽땅 합쳐도 미국의 일개 기업 애플의 시가총액보다 작은 것이 현실이다. 독일의 30개 대형 기업 기업가치가 이렇게 낮아진 것은 21세기 빅 테크 붐에 뒤처진 독일의 암울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 현실은 최근 거액의 회계부정이 드러나 상장 폐지가 결정된 독일 간판 핀테크 기업 와이어카드의 운명이 잘 보여주고 있다.  FT는 “독일 기업들이 좌초하고 있다”며 “독일 기업의 CEO들은 1~2년 내 독일 기업이 바뀌지 않으면, 완전히 낙오해 5~10년 내 공룡의 운명이 될 것이란 위기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국가 능가하는 빅 테크 위력

빅 테크의 위력과 그림자는 비단 독일 기업만의 얘기가 아니다. 미·중 패권 전쟁의 관건도 빅 테크에 달려 있고 한국 경제의 운명도 다르지 않다. 빅 테크를 장악하면 곧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을 쥐게 되기 때문이다. 빅 테크의 위력을 미국 컬럼비아대 알렉시스 위초스키(Alexis Wichowski) 교수만큼 잘 나타낸 사람도 없다. 그는 빅 테크 기업을 ‘네트국가(Net States)’라고 부른다. 주권·영토·국민을 가진 국가는 아니지만, 국경의 통제를 받지 않고 ‘디지털 네트워크’를 넘나드는 빅 테크 기업은 국가와 다름없는 존재라는 의미다.

네트국가는 웬만한 국가보다 영향력이 크다. 애플·아마존·페이스북·마이크로소프트·구글·유튜브는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국가를 넘나든다. 위초스키는 “본질적으로 지정학적, 사회적, 개인적 차원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힘과 경제력은 웬만한 국가와 경쟁할 만큼 막강해졌고, 그들이 구축한 사회적 자본은 상상 이상으로 막대하다는 얘기다.

미국이 휩쓰는 빅 테크의 가치

미국이 휩쓰는 빅 테크의 가치

무엇보다 네트국가의 가치는 이들 소비자이자 이용자들이 실물과 연결된 사이버 공간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연결하는 데서 나온다. 전 세계의 스마트폰 사용자들은 한 시간에도 몇 번씩 끝없이 인터넷을 통해 콘텐트를 확인한다. 이들은 또 빅 테크의 플랫폼을 통해 끝없이 확장하는 비즈니스에 참여하게 된다. 무엇보다 빅 테크 기업의 위력은 전통 기업과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나온다. 전통 기업이 만들어내는 기존 제품은 십중팔구 살 때 효용이 끝난다. 하지만 빅 테크는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 스마트폰은 버전이 거듭될 때마다 기능과 서비스를 새롭게 내놓는다.

그 결과 한번 주도권을 잡으면 새로운 시장 진입자가 등장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경쟁은 없고 높은 진입장벽만 세워지는 구조다. TV 프로그램이나 영상 같은 기존 콘텐트 상당수를 무료로 소비할 수 있다. 이 같은 패러다임 시프트의 대표주자 아마존은 책 판매부터 출발해 24시간 배달 물류 기술을 확보했고, 구글은 인터넷 검색에서 출발해 머신러닝 기술을 확보해 인공지능의 강자가 됐다.

위초스키는 전기차 테슬라도 빅 테크로 분류한다. 테슬라 내부에 설치된 터치패드가 그 이유를 말해준다. 내연기관 자동차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고 앞으로 어디까지 발전할지 상상하게 해주는 신개념의 자동차 내부 구조다. 이런 가능성 때문에 아직 매출액은 훨씬 작지만, 테슬라의 시가총액은 폴크스바겐을 훌쩍 넘어섰다. 테슬라는 판매 방식부터 다르다. 딜러를 거치지 않고 소비자에게 직접 차를 판매한다. 자율주행에 개발 역량을 집중하면서 운전자에게 스마트폰처럼 소프트웨어를 끊임없이 업데이트해준다.

미국, 끝없는 혁신으로 앞서가

이런 혁신이 가능한 것은 미국의 기업 생태계 덕분이다. 애플·아마존·페이스북·구글 같은 빅 테크 기업은 미국만의 기업 생태계를 누린다. 특히 미국만의 금융 인프라 위력이 크다. 미국에서는 아이디어와 기술만 있으면 벤처캐피털을 통해 얼마든지 투자를 받을 수 있다. 미국은 1980년대 주택 대부조합과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연거푸 금융대란을 겪었지만, 이런 금융 인프라가 미국적 혁신의 원동력이 되는 셈이다. 일론 머스크가 스페이스X 프로젝트를 통해 민간 유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한 것도 스타트업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벤처캐피털이 있어서 가능했다.

미국의 테크 기업 주가는 코로나 사태 와중에도 폭등세를 이어갔다. 머스크도 주가가 너무 비싸다고 했지만 테슬라는 1일(현지시간) 사상 처음으로 도요타를 제치고 시가총액 세계 1위 자동차 기업에 등극했다. 테슬라는 연 50만대를 생산하고 토요타는 연 1000만대를 생산한다. 테슬라 주가가 230달러에서 1100달러로 5배 오르는 데는 불과 12개월 걸렸다. 더구나 생활방역이 계속되면서 확산되는 언택트 산업은 테크 기업의 위력을 확장하고 있다. 정보기술 주식의 시가총액은 S&P500 주가지수 전체 가치의 4분 1을 차지하고 있다. 특정 산업의 비중이 이렇게 높았던 적은 없었다는 게 증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정도의 성공은 팬데믹 이후 세상의 변화를 고려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고 진단했다.

FT에서도 팬데믹이 끝나면 빅 테크가 훨씬 더 크고 강력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꼬리를 물고 있다. 아마존은 방역 수요와 관련된 일거리가 늘어나면서 17만5000명을 추가 고용할 만큼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소매업자로 떠올랐다. 한국에서 코로나 사태를 통해 택배 인프라가 위력을 발휘하고, 한국판 아마존을 지향하는 쿠팡 이용자가 많이 증가한 것도 인공지능을 통한 빅 테크 기술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구글과 애플은 감염자 추적 시스템 개발에 나섰고, 우버는 음식배달 서비스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고 있다.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질 기회도 그만큼 많아진다.

네트국가의 위력이 커지면서 미·중 양국 간 디지털 장벽도 세워질 조짐이 보인다. 중국은 미국의 구글·페이스북을 오래전부터 차단해왔다. 이에 맞서 미국도 ‘트로이 목마’가 될 수 있다면서 중국의 틱톡 같은 앱 차단 방안에 부심하고 있다. 최근 히말라야에서 중국과 국경 분쟁을 벌인 인도는 틱톡을 비롯해 중국 앱 59개의 사용을 금지했다. NYT는  “인터넷 세계까지 미·중 양국 갈등 때문에 쪼개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빅 테크의 핵심은 인공지능과 반도체

세계 패권을 둘러싼 미·중 경제전쟁의 향방도 빅 테크를 기준으로 가늠해볼 수 있다. 기술 패권의 관건은 결국 어느 나라가 빅 테크를 지배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미 미·중 양국은 빅 테크에서도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다. 미국에 GAFA(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가 있다면 중국에도 BAT(바이트댄스, 알리바바, 텐센트)가 있다. 더 중요한 바로미터는 빅 테크로 성장하는 유니콘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느냐가 될 수 있다.

미국은 217개로 단연 선두를 달리는 중이고, 중국은 106개로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영국 24개, 독일 12개, 한국 11개 순이다. 유니콘은 아직 상장하지 않은 기업으로서 기업가치가 10억 달러(약 12조원)에 달하는 신생 거대 기업을 의미한다. 유니콘 대다수는 업종을 불문하고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의 경우, 쿠팡·배달의민족·야놀자·토스·위메프 등은 본질적으로 인터넷에서 상거래가 이뤄진다.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아직 글로벌 차원의 빅 테크 기업이 하나도 없다. 네이버·카카오가 있지만, 국경을 넘나드는 네트국가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위력은 여전히 대단하다. 중국이 틱톡을 내세워 인기를 끌고 있지만, 미국의 빅 테크 기업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한국으로선 미·중의 빅 테크 기업 싸움을 구경만 하는 셈이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한국은 빅 테크의 위력이 커질수록 반도체의 수요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빅 테크 기업의 다양한 고성능 서비스가 늘어날수록 그런 알고리즘과 계산 능력을 뒷받침할 반도체 성능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