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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고 쓴 마스크, 쓰면 맞았다…동양인에 더 가혹한 코로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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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리건 주 일부 지역에서 유색인종에는 마스크 착용 의무를 면제해주기로 했다고 CNN이 2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CNN에 따르면 미국 오리건 주 링컨 카운티는 실내·실외의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의무 착용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백인 이외의 유색인종(people of color)에게는 앞으로 이 의무를 면제해주기로 했다. 이런 결정이 나온 이유는 마스크를 쓴 유색인종이 범죄자로 오해받거나, 인종차별적 비난에 시달리는 경우가 잦아지면서다. 

미국 오리건주 링컨 카운티 #"유색인종엔 마스크 의무 면제" #마스크 쓴 흑인엔 범죄자 편견 #동양계는 "바이러스"라며 공격 #코로나가 인종문제 현실 드러내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을 추모하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한 참가자가 미국 국기인 성조기 모양의 마스크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을 추모하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한 참가자가 미국 국기인 성조기 모양의 마스크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오리건 주 링컨 카운티 관계자는 "인종차별적 괴롭힘을 걱정하는 유색인종 주민에겐 마스크를 꼭 쓰라고 요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링컨 카운티는 특정 인종에 마스크 착용 의무를 면제한 첫 마을이 됐다고 CNN은 보도했다. 주민 5만 명이 사는 이곳은 백인 비율이 90%에 달한다. 흑인과 라틴 아메리카계 등 유색인종은 10%에 불과하다.

지난 3일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조지 플로이드 추모 시위가 열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3일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조지 플로이드 추모 시위가 열리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흑인·히스패닉 "범죄자로 오해받을라" 곤혹 

지난 4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모든 미국인에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쓰라고 권고했을 때, 상당수 흑인과 라틴 아메리카인들이 곤혹스러워했다. 백인은 마스크를 써도 아무 오해도 받지 않지만, 마스크를 쓴 흑인·히스패닉은 강도 등 범죄자로 여기는 인식 탓이다.   

지난 5월 마스크를 쓰고 쇼핑을 하다가 불심검문을 당한 캠 버크너 의원 [트위터]

지난 5월 마스크를 쓰고 쇼핑을 하다가 불심검문을 당한 캠 버크너 의원 [트위터]

실제로 그런 사례가 지난 5월 있었다. 미국 시카고에서는 한 흑인 주 하원의원이 마스크를 쓰고 매장을 찾았다가 불심검문을 당했다. 민주당 소속 캠 버크너 하원의원도 마스크를 쓴 운동복 차림으로 쇼핑을 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검문한 경찰은 그에게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하려고 코로나를 이용하고 있다. 당신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버크너 의원은 "나는 변호사이자 선출직 공무원으로 이런 상황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아시아계엔 "코로나는 너희 탓" 증오범죄 표적

한편 아시아계는 다른 이유로 마스크 착용이 껄끄러웠다. 마스크를 썼다는 이유로 코로나19 환자로 오해를 받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아시아계를 향해 "당신들이 코로나를 옮겼다"며 욕설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일도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를 '차이나 바이러스', '쿵 플루(쿵푸와 플루의 합성어)'로 지칭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부추겼다. 비단 중국계뿐 아니라 외모가 비슷한 아시아계 미국인들도 증오 범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잦았다.

마스크를 쓴 동양계에 대한 증오범죄가 빈발하고 있다는 보도가 지난 4월 나왔다. [OZY]

마스크를 쓴 동양계에 대한 증오범죄가 빈발하고 있다는 보도가 지난 4월 나왔다. [OZY]

마스크를 쓴 동양계만 골라 공격하는 범죄도 벌어졌다.

지난달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는 동양계 남녀가 손을 잡고 마스크를 착용한 채 걷다가 백인 남성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는 "코로나는 당신들 잘못"이라고 소리 지르며 남성의 얼굴을 밀치고 위협하다가 침을 뱉고 도망갔다. 북미·유럽에서는 마스크를 쓴 동양계 여성만 골라 공격하는 사례도 있었다. 범죄의 표적으로 삼기 쉽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동양에서는 마스크를 쓰는 것이 아무렇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상대방을 위협하는 의미가 될 수 있다"면서 "이런 '마스크 기피증'을 구실 삼아 마스크를 쓴 동양계를 대상으로 혐오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코로나 19 확산 이후 잇따르고 있다"고 전했다.

쓰면 오해, 안 쓰면 감염… '마스크 딜레마'

비단 마스크 문제뿐 아니라 코로나19는 미국 사회의 인종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미국 공공미디어 연구소는 흑인의 코로나 19 사망률이 백인이나 아시아계의 사망률보다 2.3배 높은 것으로 추정했다. 열악한 주거, 근로 환경이 이런 차이를 빚어냈다는 분석이다.

하버드대 카마라 존스 전염병학 교수는 "흑인과 히스패닉은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고 바이러스에 노출되기 쉬운 직업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다"고 말했다. 배달업·도축업·요식업 등이 대표적이다. 코로나19에도 일을 쉬거나 재택근무를 하기 어려운 직종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하니 이중의 고통에 시달리는 셈이다. 미국 시민자유연맹에서 일하는 레니카 무어 국장(인종 정의 담당)은 "흑인에겐 (마스크를 쓰거나 안 쓰거나) 어떤 방향이든 '루즈-루즈(lose-lose)' 시나리오가 된다"고 문제를 지적했다.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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