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진 16명' 러시아 선박에 뚫린 부산…서류만 보고 "통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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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혹진판정을 받은 러시아 선원들이 23일 오후 부산 연제구 부산의료원 음압병실로 들어가고 있다.송봉근 기자

코로나 혹진판정을 받은 러시아 선원들이 23일 오후 부산 연제구 부산의료원 음압병실로 들어가고 있다.송봉근 기자

부산항 감천부두에 입항한 러시아 국적 선박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16명 쏟아지면서 항만 방역에 '구멍'이 뚫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류 검역이 진행되며 유증상자 통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러시아 국적 냉동 화물선 승선원 16명 확진 #국내 접촉자만 176명, 추가 환자 발생할 듯 #러시아 코로나 누적 확진자 59만명, 세계3위

질병관리본부 중앙방역대책본부는 23일 러시아 국적 냉동 화물선 A호(3933t) 승선원 21명 중 16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들과 동선이 겹치는 등 밀접접촉한 사람들의 숫자도 적지 않다는 데 있다.

지난 21일 입항해 하역 작업이 이뤄진 A호에서 러시아 승선원들과 접촉한 것으로 분류돼 진단 검사를 진행 중인 인원만 176명이다.

여기에 러시아 승선원과 직접적으로 오가며 만난 부산항운노조원과 수리공, 화물 검수사, 하역업체 관계자, 수산물 품질관리원 소속 공무원 등 밀접 접촉자도 61명에 이른다.

방역 당국은 또 A호와 같은 선사 선박(Ice crystal)도 인접해 정박, 선원 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이 선박 선원 21명, 하역작업자 63명도 추가 접촉자로 분류했다.

23일 부산 감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국적 냉동 화물선 A호.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선원 16명이 이날 선내 격리생활을 마치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연합뉴스

23일 부산 감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국적 냉동 화물선 A호.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선원 16명이 이날 선내 격리생활을 마치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연합뉴스

권준욱 방대본 부본부장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우리 국민 접촉자 중에 추가 환자가 발생할 것을 현재로선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방대본 설명에 따르면 러시아 냉동 화물선 A호는 지난 21일 오전 8시쯤 감천 부두에 입항했다. 러시아 선박은 검역 관련 서류를 전자시스템으로 제출하는 '전자 검역' 대상으로 입항이 이뤄졌다. 일종의 서류 검역만으로 입항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손태종 방대본 검역지원팀장은 "전자 검역이더라도 유증상자가 있다고 통보를 하면 검역관이 검역 단계에서 배에 승선해 검역조사를 한다"며 "그런데 A호는 코로나19 관련 유증상자 통보를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코로나 혹진판정을 받은 러시아 선원들이 23일 오후 부산 연제구 부산의료원 음압병실로 들어가고 있다.송봉근 기자

코로나 혹진판정을 받은 러시아 선원들이 23일 오후 부산 연제구 부산의료원 음압병실로 들어가고 있다.송봉근 기자

이에 따라 A호는 지난 21일 별다른 검역 없이 감천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벌였다.

하지만 다음날인 22일 A호의 해운대리점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원 교대가 있었고, 당시 하선한 선장이 코로나19에 확진됐다'는 신고가 뒤늦게 들어왔다.

검역관이 부랴부랴 배에 올라가 검역을 한 결과, 고열의 유증상자 3명을 발견했고 선원 전원에 대해 진단 검사를 한 결과 16명이나 확진된 것이다.

코로나19 해외유입 환자 급증. 그래픽=신재민 기자

코로나19 해외유입 환자 급증. 그래픽=신재민 기자

당국은 러시아 측이 미리 통보하지 않았다고 해명하지만, 선제적인 방역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비판이 나온다.

선박 입항은 크게 전자 검역과 승선 검역으로 이뤄지는데, 러시아의 경우 코로나19 환자가 크게 늘고 있는 만큼 승선 검역 대상으로 지정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승선 검역은 검역 관리 지역에서 왔거나, 코로나19 의심 환자가 있다고 통보한 선박에 직접 올라 검역하는 것을 뚯한다.

현재 코로나19 확진자가 많이 발생한 중국과 이란, 이탈리아에 대해선 승선 검역이 이뤄지고 있다.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부본부장(국립보건연구원장)이 5일 오후 충북 청주시 질병관리본부에서 코로나19 국내 발생현황 및 확진환자 중간조사 결과 등 정례브리핑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부본부장(국립보건연구원장)이 5일 오후 충북 청주시 질병관리본부에서 코로나19 국내 발생현황 및 확진환자 중간조사 결과 등 정례브리핑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권 본부장도 "러시아가 최근 유럽 전체 대륙에서 발생하는 코로나19의 거의 5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러시아도 승선 검역 대상으로 포함해 관리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러시아는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미국(약 230만 명), 브라질(약 110만 명)에 이어 3위(약 59만 명)다. 코로나19 고위험국이다.

더구나 현재 승선 검역 대상인 중국, 이란, 이탈리아보다 확진자 발생이 적어도 3배 이상 많다. 이란 누적 확진자가 현재 약 20만 명이다. 인구당 발생자 수를 따져도 러시아가 중국, 이란, 이탈리아보다 월등히 많아 승선 검역 대상에 포함시키는 게 더 합당하지만 이에 대한 대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코로나19 세계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코로나19 세계 현황.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당국은 일단 A호의 러시아 선사 측이 유증상자 신고를 소홀히 한 만큼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방침이다.

권 부본부장은 "통상 국제보건규칙에 따라 선박에서 하선한 사람 중 코로나19 감염자가 나왔다면 이를 알게 된 국가에서 최종 목적지 국가에 통보해주는데 이번에는 담당자 연락이 없었다"며 "검역법에 따라 과태료 처분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러시아가 최근 한 두달 사이 환자가 폭발적으로 발생한 측면이 있고, 선박은 코로나19 감염에서 위험한 장소"라며 "항만 방역에 선제적 조치가 이뤄졌어야 하는데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엄 교수는 다만 "코로나19 발병이 다양한 집단에서 나오고 있는데, 질병관리본부가 모든 걸 감당하긴 버거운 측면이 있다"며 "턱없이 부족한 예산과 인력으로 방역 슈퍼맨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덧붙였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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