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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용 관련단체 88% 찬성했다는 '문희상안' 부활 가능성은?

중앙일보

입력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11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정상회의에서 기념촬영을 마치고 자리로 향하고 있다. 이날 두 정상은 아세안(ASEAN)+3 회의 직전 대기실에서 만나 11분간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이후로도 양국 관계는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등을 둘러싸고 해법의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냉각 상태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11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정상회의에서 기념촬영을 마치고 자리로 향하고 있다. 이날 두 정상은 아세안(ASEAN)+3 회의 직전 대기실에서 만나 11분간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이후로도 양국 관계는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등을 둘러싸고 해법의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냉각 상태다. [연합뉴스]

 한ㆍ일 간 강대강 충돌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인 강제징용 문제를 풀 수 있는 묘수는 없을까.

[출구 없는 강제징용, 시한폭탄된 한·일관계 下] #지난 국회 '문희상안' 입법으로 포괄적 해결 가능 #행안부 산하 재단 조사선 59곳 중 53곳(89.8%) 찬성 #소송 대리인단·일부 시민 단체는 "日에 면죄부" 반대 #日자산 한국이 매입도 거론…"청와대·총리 관저가 관건"

강제징용 문제의 난제 가운데 하나는 현재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이들 외에 ‘소송 밖’ 피해자들이 줄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다. 일본 기업이 끝까지 “판결 수용 불가”를 고수하면 국내 일본 기업에 대한 자산 압류가 점점 불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①‘문희상안’ 부활 가능성은

 이런 가운데 지난 20대 국회에서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대표 발의했다가 자동 폐기된 기억·화해·미래 재단 설립안(일명 문희상안)을 강제징용 관련 단체들 다수는 찬성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지원재단(지원재단)에 따르면 재단이 올해 1월 실시한 자체 설문조사에서 산하 단체 59곳 가운데 53곳(89.8%)은 “문희상안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반대 의사를 밝힌 곳은 4곳,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한 곳은 2곳으로 집계됐다. 지원재단은 2015년까지 특별법에 따라 한시적으로 운영되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위원회의 잔여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2014년 행안부(당시 행자부) 산하 단체로 설립된 곳이다. 강제징용 관련단체의 지원사업을 하는 공식 창구라고 볼 수 있다.

 재단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단체는 주로 유족회로, 회장단에 일일이 전화를 돌려 조사한 것”이라며 “이들은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은 강제징용 관련 단체에 의견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전했다.

 이들이 문희상안에 찬성했던 이유는 포괄적 해법이라는 점에서다. 문희상안은 재단을 설립해 대법원 확정 판결 원고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되,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도 위자료를 신청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급 시한은 2018년 대법원 판결로부터 3년으로 정했다. 민사 소송 당사자 간 합의가 있으면 판결 결과를 꼭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한국 정부 안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일본 정부 안에서도 기대감이 있었다고 한다. 법안은 제3조에서 “사법적 절차보다 화해로 소송 비용을 절약하기 위한 것”임을 명시했는데, 일본에서 2007년 니시마쓰(西松) 건설이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화해 절차로 합의한 전례가 있다.

 지난해 11월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강제징용 문희상 안에 대한 피해자 시민사회단체 공동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11월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강제징용 문희상 안에 대한 피해자 시민사회단체 공동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다만, 대법원 판결의 피고 기업의 참여를 강제할 수 없다는 점은 문희상안의 한계다. 일본 기업·정부 차원의 사죄를 명문화할 수도 없다.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정치적 합의로 일본 정부·기업의 사과 등 ‘성의 표시’가 담보 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 강력히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 11월 27일 강제징용 소송 대리인단과 정의기억연대·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 등 20여 명은 국회 앞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문희상안의 즉각 폐기”를 요구했다. “자발적 기부금 방식은 가해 기업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는 이유였다. 이들은 의장실에 항의 서한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 때는 법안이 발의되기 전으로, 초안에 화해·치유재단의 잔금 60억원을 새로운 재단으로 이관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정의연 등 여성단체의 항의로 해당 내용은 빠진 채 발의됐다.

 “국회의 입법 사안”이라며 여론을 관망하던 정부는 이 때를 기점으로 “반대하는 피해자가 있는 한 정부가 힘을 실어 주기는 어렵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굳혔다.

 정의연은 문희상안의 좌초와 관련해 강제징용 유족회의 비판이 제기되자, 이달 5일 입장문을 내고 “사실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정의연은 “(문희상안 초안에)화해·치유 재단 잔액 60억원을 포함한다는 내용이 있어 반대한 것”이라며 “문희상안은 윤미향 전 이사장이 반대해 무산된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문제점 때문에 관련 단체들과 피해자 당사자들은 물론 민주당 내 다수의 국회의원들도 반대했다”고 밝혔다.

 문희상안을 부활시키려는 입법 시도도 있다. 지난 8일 윤상현 무소속 의원 등 야당 의원 12명이 문희상안과 동일한 법안을 다시 발의했다. 다만 지난 국회에서 여·야 의원들이 고르게 포진했던 것과 달리, 야당 의원들로만 구성 돼 추진 동력이 다소 떨어질 수 있다는 평이 있다.

일본 강제징용·‘위안부’ 피해자와 유가족 단체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양순임 회장(가운데)이 1일 오후 인천 강화군 선원면의 한 음식점에서 정의기억연대 해체와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일본 강제징용·‘위안부’ 피해자와 유가족 단체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양순임 회장(가운데)이 1일 오후 인천 강화군 선원면의 한 음식점에서 정의기억연대 해체와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②한국 정부의 일본 기업 자산 인수?

 “현금화를 피할 수 없다면, 매각 절차에 들어가는 일본 기업 자산을 한국 정부가 매입해 일본에 다시 돌려주라”는 방안도 일본 쪽에서 거론된 적이 있다고 한다. 관련 내용에 밝은 외교 소식통은 “한국 정부가 그냥 넘겨 줄 수는 없고, 일본 기업의 사죄와 반성, 또는 기금 출연 등을 전제로 돌려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아이디어였다”고 말했다. 별도의 입법 조치가 필요 없고, 대법원 판결을 이행한다는 점에서 한국도 받아들일만 하지 않겠냐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 방안도 따져보면 한·일 양국 정부가 져야할 정치적 부담이 만만치 않다. 일본으로서는 대법원 판결에 따른 자산 매각 절차를 받아 들여야 하고, 한국 정부로서는 정부 예산으로 일본 기업의 자산을 사들인다는 얘기기 때문이다. 한·일 정부 안에서 ‘비둘기파’를 담당하는 외교부-외무성 차원의 아이디어로 보이지만, 결국 청와대와 총리 관저가 움직이지 않는 한 현실성이 떨어질 수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모테기 도시미쓰 신임 일본 외무상이 지난해 9월 26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가진 상견례 및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한일 외교장관간 회담은 일본 외교안보라인 교체 이후 처음이었다. [NHK 홈페이지 캡쳐, 뉴스1]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모테기 도시미쓰 신임 일본 외무상이 지난해 9월 26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가진 상견례 및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한일 외교장관간 회담은 일본 외교안보라인 교체 이후 처음이었다. [NHK 홈페이지 캡쳐, 뉴스1]

 대구지법 포항지원이 공시 송달 절차에 들어간 이달부터 외교가에서는 비관적인 전망이 차츰 짙어지고 있다. 양국 관계가 천천히 끓어오르는 가마솥 속의 개구리처럼 결국 최악으로 안착할 것이라는 우려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안타깝게도 양국 정부의 국내 정치를 고려할 때 어느 쪽도 적극적으로 움직일 만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어떤 방안이든 청와대와 총리 관저의 정치적 결단이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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