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론] 北 核협박이 세진 까닭

중앙일보

입력

북한은 최근 협박외교를 강화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북한은 유엔에서 핵억제력 보유를 피력했으며, 다음날 외무성은 폐연료봉(사용후 핵연료봉) 재처리를 완료했고, 이를 통해 얻은 플루토늄을 핵억제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용도를 변경했다고 주장했다.

그러고 하루 뒤 영변 원자로가 정상적으로 가동하고 있고 재처리 시설도 재가동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에는 협박하고 국제사회에는 부정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이제는 공공연하게 핵억제력 운운하면서 핵무기 보유 의사를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북한의 주장에는 적지 않은 모순이 따른다. 8천여개에 달하는 사용후 핵연료봉을 모두 재처리했다고 했지만 정작 재처리 작업을 하는 영변 재처리 공장은 재가동할 준비가 이제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2의 대규모 재처리 시설이 있다는 것인가?

최근 일련의 발언은 일단 차기 6자회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밑에서 6자 사이에 두번째 회담 개최를 위한 활발한 외교접촉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 북한이 연일 핵협박 수위를 강화한 것은 6자회담에 앞서 몸값 올리기로 볼 수 있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비밀 핵개발이 드러난 이래 부시 정부의 대북 압살정책 때문에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대북 압살정책이 포기돼야만 핵개발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북한은 미국이 불가침 약속을 해야만 포기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북한이 연일 핵협박을 강화하는 것은 6자회담을 앞두고 참가에 대한 대가를 극대화하고 소위 대북 안보우려 해소에 대한 미국의 입장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현 상황에서 본다면, 최근 북한의 협박외교는 협상기술적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일거수 일투족을 단기적 시야에서 모두 협상용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이 안보우려를 해소하면 북한이 핵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보는 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장기적 시야에서 북한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한다면, 놀라울 정도로 일관되게 착실히 핵무기로 다가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난관에 부딪히면 우회하고 국제사회의 인내가 한계에 달하면 합의하고 하지만 다른 방안을 강구하고….

지난 20년 가까이 핵협상은 이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북한이 보유한 핵시설은 장난감 총이 아니라 정말 실탄이 나가는 총이며, 이제 모든 제조 공정을 갖추고 대량생산만을 기다리고 있다. 1994년 국제사회의 인내가 한계에 달했을 때 북한은 핵무기의 대량생산 체제에 들어가는 것을 일단 접었다.

그러나 북한은 제네바 합의를 통해 양적 확산은 할 수 없었지만 질적인 확산, 즉 핵무기의 고도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지난 10년간 북한은 제네바 합의 틀 아래서 수적 증가는 불가능했지만 추출했던 플루토늄을 갖고 핵무기를 개발.개량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이제 북한은 핵억제력 운운은 물론 핵실험도 할 수 있고, 해외에 이전할 수 있다고 협박할 정도가 되었다. 핵무기 개발에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대량생산일 뿐이다. 문제는 국제사회가 이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북한은 난관을 앞에 두고 특유의 벼량끝 외교를 전개하고 있다.

우리의 대북정책은 선의(善意)에서 출발한다. 북한 정권은 변하려 하는데 대내외 환경이 조성되지 않아 변화를 추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정책은 북한이 변화할 수 있는 대내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이라크 파병 문제조차 우리는 북핵 문제의 안정된 대화 국면을 강조하고, 비록 연계는 아니지만 미국이 북한의 안보우려를 해소하는 조치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노골적인 핵무기 개발 의사는 선의를 갖고 대북 정책을 취하고 있는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핵문제 해결을 위한 시간적 여유는 그리 많지 않다. 핵활동 동결이 전제되지 않고 핵협박을 지속한다면 협상은 조기 좌초할 가능성이 크다. 대내외 환경조성도 중요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북한이 결국 구태(舊態)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이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