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건은 핵심 아니라는 한국판 뉴딜…3대 관문 못 넘으면 도루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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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뉴딜의 윤곽이 나왔다. 데이터와 인공지능(AI), 5G 기술을 기반으로 한 인프라 구축 사업이 중심이 된다. 정부는 "과거 토목사업 위주의 뉴딜과 차별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정책의 대전환이 없으면 다음달 확정될 구체안은 '다시 토건'이 될 것이란 우려도 적지 않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7일 2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를 열어 이런 내용의 뉴딜 추진 방향을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로서 이른바 한국판 뉴딜을 추진할 기획단을 신속히 준비해달라”고 주문한 지 보름 만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2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2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한국판 뉴딜의 방향은 세 갈래다. 디지털 인프라 구축, 비대면 산업 육성, 사회간접자본(SOC)의 디지털화다. 구체 사업은 다음 달 확정되지만, 힌트는 나왔다. 전기ㆍ통신 요금 같은 비금융 정보를 바탕으로 한 신용평가가 대표적이다. 흩어져 있는 개인정보를 모은 ‘마이데이터’ 기술을 의료ㆍ금융에 활용하는 사업, AI 기반의 상권 분석, 교통 빅데이터 플랫폼, 데이터 진위 조회 서비스 등도 포함된다.

목표와 원칙도 제시됐다. 홍 부총리는 이날 회의에서 “한국판 뉴딜은 코로나19를 계기로 디지털화 가속, 비대면화 촉진 등에 중점을 둔 디지털 기반 일자리 창출, 경제 혁신 가속화 프로젝트”라고 규정했다. 이어 “기존의 토목사업 위주의 경기 부양성 뉴딜 개념과는 확연히 구별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약속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2009년 편성된 28조원 규모 ‘수퍼 추경’ 때도 애초엔 고용 창출, 서민 지원을 내세웠다. 그러나 결국은 SOC 사업 편중, 국회의원 지역구 예산 나눠 먹기로 변질했다. 건설ㆍ토목사업은 돈을 투입하기도 쉽고, 일자리·생산·투자 관련 수치도 단기간에 눈에 띄게 늘릴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성과를 내야하는 정부 입장에선 유혹이다. 이날 발표에서도 노후한 도로ㆍ철도를 스마트 기술을 적용해 보수하겠다고 밝혔는데 구체 방안은 여전히 모호하다. 경제 정책의 주도권이 갈수록 여당으로 쏠리는 상황에서 지역 민원에 기반을 둔 요구를 뿌리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김경수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제목만 디지털ㆍ비대면이라고 붙이고 다시 SOC 투자에 집중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뉴딜이든, 아날로그 뉴딜이든 결국 목표는 일자리다. 정부도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강조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에 대한 투자가 오히려 코로나19로 가장 타격을 입은 단순 일자리를 줄일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된다. 딜레마를 풀려면 디지털에 기반한 새로운 서비스업을 키워야 한다. 원격 의료가 대표적이다. 의료계 등의 반대가 거센 상황이라 정부가 단단히 마음을 먹지 않으면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미 김이 새는 분위기다. 김용범 기재부 1차관은 이날 “한국형 뉴딜에서 비대면과 관련된 의료는 시범사업 대상을 확대하고 인프라를 보강하는 내용에 국한된다”며 “원격의료의 제도화를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김원식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원격의료는 규제 개혁이 핵심”이라며 “규제 완화가 동반되지 않으면 신산업 영역에선 결국 정부가 기득권 편을 든다고 생각하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홍남기 부총리는 7일 2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회의에서 한국판 뉴딜 추진 방향을 발표했다. 뉴스1

홍남기 부총리는 7일 2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회의에서 한국판 뉴딜 추진 방향을 발표했다. 뉴스1

민간이 잘하는 일은 민간에 맡기고, 정부는 민간이 잘할 수 있도록 판을 깔겠다는 약속도 기업들은 믿지 못하는 분위기다. 정부가 예시로 제시한 비금융정보 기반 신용평가, 마이데이터 등은 이미 민간에서 활발히 투자하고 경쟁하는 분야다. 이날 정부 발표로 관련 주가가 들썩이긴 했지만 마냥 반길 일만은 아니다. 민간 영역과의 충돌, 중복 투자 가능성 때문이다.

공공 영역이 시장을 비트는 일은 이미 진행 중이기도 하다. 수수료 부담을 줄이겠다며 배달앱, 각종 페이 등을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경쟁적으로 개발ㆍ배포하고 있다. 수십조원 규모로 예상되는 한국판 뉴딜 예산이 풀린다면 이런 흐름이 가속할 우려가 있다. 또 한국판 뉴딜 핵심 사업으로 언급된 5G, 데이터 등 사업이 대기업 중심으로 이미 투자가 진행 중인 부분이라 ‘나랏돈으로 대기업 사업 도와준다’는 비판도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한편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뉴딜 세부 사업을 확정할 방침이다. 다음 달 초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하면서 세부 방안이 공개된다. 예산 투입 규모도 이때 정해진다. 올해 안에 집행 가능한 사업 예산은 3차 추가경정예산에 반영된다. 나머지 집행·투자에 시간이 더 걸리는 사업 예산은 2021~2022년 예산에 순차적으로 담긴다.

세종=조현숙ㆍ김도년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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