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주민 48명 20만원씩" 정부 아닌 마을이 재난지원금 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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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간에 쌓아두기만 하면 됩니까. 어려울 때 풀어야지." 주민들이 십시일반 모아둔 마을기금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어르신들에게 나눠준 '마을형 재난지원금'이 등장했다. 정부나 지자체가 아닌 마을 공동체가 재난지원금을 주는 첫 사례다.

전북 완주군 상관면 정좌마을 주민들 20만원씩 받아 #공동체 사업·십시일반 모아왔던 마을기금으로 나눔 #"코로나19로 어려움 겪는 어르신들과 나눠서 기뻐"

주민 48명에게 20만원씩 주는 마을 재난지원금

전북 완주군 상관면 정좌마을 김진곤(54) 이장은 1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우리 마을에 거주하는 20세대 48명 주민에게 마을기금을 재원으로 각각 20만원씩 '코로나19 마을 재난지원금'을 오늘까지 모두 전달했다"고 말했다. 시골 마을 특성상 수혜자 대부분이 고령이다. 정좌마을의 재난지원금 수혜자 중 최고령은 93세다.

전북 완주군 상관면 정좌마을 김진곤 이장이 지난달 30일 마을주민에게 마을기금으로 마련한 '코로나19 마을 재난지원금'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 완주군

전북 완주군 상관면 정좌마을 김진곤 이장이 지난달 30일 마을주민에게 마을기금으로 마련한 '코로나19 마을 재난지원금'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 완주군

김 이장은 "코로나19 이후로 마을 어르신들의 수입이 크게 줄었다"고 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아니었다면 공공근로 일자리를 나가거나 사람을 데려와 농사일도 했겠지만, 마땅한 일거리가 없다.

김 이장은 "고령이신 분들은 농사를 포기하신 분도 있고 가진 전답을 세를 놓으신 분도 많다"며 "수입이 줄어 힘든데 마을기금을 쌓아놓기만 하면 뭐하냐는 생각에 재난지원금으로 쓰자고 제안했다"고 했다.

마을기금으로 상수도 놓았던 정좌마을

주민들이 어려울 때 마을기금을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좌마을은 지난 2014년 마을 주민들이 부담해야 하는 1세대당 상수도 비용 40만원을 마을기금으로 해결했다.

2014년 이전에는 관정을 파서 나온 지하수를 마을 상수도로 이용했었다. 하지만 가뭄이 들면 물이 부족하고 오염될 가능성도 있어 상수도를 놓아야 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김 이장은 "상수도를 놓으려면 1세대당 50만원은 필요한데 어르신들인지라 목돈이 들어가니 꺼리셨다"며 "쌓아둔 마을기금을 풀 테니 이왕이면 깨끗한 물을 쓰자고 해서 20세대 모두에게 40만원씩 지원했다"고 했다.

"어려울 때 나눠야 진정한 마을기금"

정좌마을의 마을기금은 공동체 사업을 추진해 얻은 수익금과 동네 행사 협찬금 잔액과 동네 주민들이 관광이나 마을잔치를 하려고 십시일반 모아왔던 돈이다. 명절 때면 마을기금을 이용해 10만원 상당의 생선과 과일도 어르신들에게 전해왔다.

김 이장이 마을기금으로 서로 돕자고 제안할 때 정좌마을 주민 모두 반겼다. 김 이장은 "마을총회를 열고 어르신들이 코로나19 때문에 우울해 하시고 어려워하니 나누자고 제안했더니 모두 찬성했다"며 "서로 나눠왔던 것이 익숙해 이번에도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셨다"고 했다.

정좌마을은 또다시 코로나19처럼 예기치 못할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마을기금을 모두 사용하지 않고 남겨뒀다. 마을에 사건·사고가 일어나거나 올해처럼 힘든 일이 생기면 마을기금으로 주민들과 나누려고 한다.

김 이장은 “마을기금을 쌓아놓기보다 동네 어르신들이 살아계실 때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며 “제안만 했을 뿐인데 어르신들이 더 좋아하시는 모습에 너무 기쁘다”고 했다.

완주=진창일 기자 jin.cha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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