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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관제 금 모으기 운동으로 변질하는 재난지원금 파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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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긴급재난지원금은 말 그대로 구휼이라는 취지에 맞춰 처음부터 취약계층에 집중적으로 지급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재난지원금이라는 포장으로 재정 살포에 나서면서 끝없는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는 총선에서 힘을 키운 거대 집권당이 “부자들은 기부하라”는 분위기를 띄우면서 국민적 갈등과 함께 공연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국민에 기부 강요하고 정치권이 생색 #취약계층에 집중하는 책임 행정 펴야

지금 돌아보면 재난지원금은 기획재정부가 처음 제시한 대로 소득 하위 50% 가구에 지원하는 게 타당했다. 하지만 여당이 반대하자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소득 하위 70%에게 지급하자”고 절충안을 내놓았지만 이마저도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어제 국회에서는 전 국민(4인 가족 기준) 100만원 지급 방안이 확정됐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총선에서 “고민정 후보가 선출되면 전 국민에게 10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한 대로다. 하지만 여기서 혼란이 끝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증폭되고 있다. 부유층은 재난지원금 신청을 포기함으로써 기부하라는 압박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1호 기부자’로 거론되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공직사회가 기부에 동참하고, 대기업·고소득자를 비롯해 국민적 기부 분위기가 잡히면 수조원 확보가 가능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재난지원금에 ‘플러스 알파’를 기부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홍 부총리도 “난 안 받을 것”이라며 “공무원들 기부는 자유”라고 밝히면서 고위 공직사회도 기부가 기정사실로 되고 있다. 더구나 경기도는 이미 받은 지원금을 빼고 지급한다니 불만이 터져나온다.

이쯤 되면 정부는 “양심을 강요하는 게 무슨 정책이냐”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국민 분열은 물론이고 정부 정책의 신뢰성까지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는 “대통령부터 한다면 재계가 그냥 있기 어렵다”면서 “사재를 내놓으라는 얘기”라고 우려했다. 100만원을 기부하면 세액공제를 통해 15만원을 돌려받으니 85만원은 포기해야 해서다. 집권당 주도로 부유층의 기부를 강제하는 것과 다름없다.

외환위기 때의 금 모으기가 거론되고 있지만, 그때 국민이 돌반지·결혼반지를 들고 나온 것은 그야말로 국가 부도 위기 앞에서의 자발적인 의지와 선택이었다. 지금처럼 “부자니까 기부하라”는 식의 관제 금모으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런 방식의 기부를 강요하면 자칫 국민 편 가르기만 부추길 수 있다. 소득이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은 이미 소득 하위 45% 국민이 면제받는 소득세를 책임지고 건강보험료 부담도 막대하다. 여기에 기부까지 강제하는 분위기로 몰아가 부담을 가중시키고 생색은 집권 여당이 낸다면 이것은 정치도, 행정도 아니다. 이제라도 정교한 정책 집행으로 정책 신뢰를 얻고 취약계층을 보호하라는 정부 여당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