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용서"···'성폭행혐의' 김준기 전회장, 집유로 풀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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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 전 DB그룹(옛 동부그룹) 회장이 지난 10월 23일 새벽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체포돼 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김준기 전 DB그룹(옛 동부그룹) 회장이 지난 10월 23일 새벽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체포돼 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가사도우미를 성폭행하고 비서를 추행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준기 전 동부그룹(현 DB그룹) 회장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김 전 회장을 용서한 점에 주목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6단독 이준민 판사는 17일 오후 피감독자간음·강제추행·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김 전 회장에게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강의 수강과 각 5년의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및 장애인 복지시설 취업제한도 명령했다.

김 전 회장은 경기 남양주시에 위치한 자신의 별장에서 일하던 가사도우미 A씨를 2016년 3월부터 11월까지 8차례에 걸쳐 성추행하고, 5차례에 걸쳐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또 20대 여성인 비서 B씨를 2017년 2월부터 7월까지 모두 29차례에 걸쳐 성추행한 혐의도 있다. 검찰은 김 전 회장이 추행을 거부하기 어려운 지위에 있는 피해자들에게 위력을 이용해 추행했다고 보고, 재판부에 징역 5년을 요청했다.

재판에서 김 전 회장은 성관계 등 기본적인 사실관계는 대체로 인정했지만, 피해자들의 동의가 있었던 것으로 믿었다고 주장했다. 성폭력의 고의는 없었다는 취지다. 김 전 회장의 변호인은 지난달 13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김 전 회장은 피해자들이 입은 상처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면서도 “피해자들이 김 전 회장의 행동에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재판부 “모범 보여야 할 그룹 총수, 책무 망각”

이날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진술이 자세하고 사실관계와 모순되는 것을 찾기 어려워 신빙성이 높다”며 김 전 회장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인처럼 지냈다”는 김 전 회장의 말도 거짓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사회적으로 모범적 행동을 보여야 할 그룹 총수의 지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책무를 망각한 채 범행을 저질러 죄질이 좋지 않다”며 “피해자들은 모두 피고인의 지시에 순종하여야 하는 관계이고 취약한 처지에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재판부는 피해자들 모두 김 전 회장을 용서한 점을 참작했다. 두 명의 피해자 모두 수사와 재판 과정을 거치며 김 전 회장을 용서하고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재판부에 전달한 바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 재판부는 김 전 회장에게 징역 2년 6월과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피해자 용서'에 집행유예

법조계 일각에선 김 전 회장의 집행유예형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경찰 수사까지 피하며 해외에 머무르던 피고인에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게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2017년 7월부터 질병 치료를 이유로 미국에 머물던 김 전 회장은 성추행 의혹이 불거지자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경찰 수사를 피해오던 김 전 회장은 경찰이 여권을 무효화하고 인터폴 적색수배를 내리는 등 압박해오자 2년 3개월만인 지난해 10월 귀국해 체포됐다.

현직 시절 성폭력범죄 전담 검사였던 오선희 변호사(법무법인 혜명)는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을지라도, 복수의 피해자가 있고 피고인이 뒤늦게 귀국해 체포되는 등 집행유예를 선고할 만큼의 사안인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 전 회장은 지난달 최후변론을 통해 “지근거리에 있던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것에 대해서 대단히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가 선처해준다면 남은 생을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에 공헌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2월 13일 열린 재판 기일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많은 기업이 패닉상태 빠져있고 하루속히 혼란을 수습해야 하는데 저도 동참하고 싶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백희연 기자 baek.hee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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