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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봄이면, 우리도 꽃을 피워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29)

‘무사하시지요?’ ‘마스크 구했어요?’ 시절 인사가 생겨났다. 신종코로나19가 확산을 멈추지 않으면서 지인들 간에 주고받는 말들이다. 고비는 넘긴 듯 보이나 그 끝은 아직 장담하기 이르다. 딸이 간호사다 보니 종종 병원에서 생긴 작은 일들을 전해 듣는데 이야기들이 내게 무척 많은 깨달음을 준다.

얼마 전 딸이 돌본 환자분은 여성이었다. 삼십 대 환자였는데 안타깝게도 말기암의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독한 항암 치료로 온몸은 지치고 고왔던 머릿결은 오간 데 없어 모자로 가린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서 하루하루 견디는 아픈 삶의 연속이었다. 딸이 그녀에게 가서 통증은 심하지 않은지 어디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묻고 케어를 하는데, 그녀가 기운 없이 누워 대답만 겨우 하다가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더란다. 간호사 선생님한테서 좋은 향기가 난다며 희미하게 미소를 짓더라는 것이다.

독한 항암 치료로 온몸이 지쳐 기운 없이 누워있던 환자분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사진 Pixabay]

독한 항암 치료로 온몸이 지쳐 기운 없이 누워있던 환자분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사진 Pixabay]

참으로 오랜만에 본 그녀의 미소였기에 딸은 무척 기뻤다고 한다. 딸은 무슨 냄새일까 생각하다 자신이 아침에 뿌리고 나온 향수 냄새를 말하나 싶어 그 향수 이름을 그녀에게 알려줬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침에 뿌린 향수가 공교롭게도 두 가지였던 것을 알게 된 딸. 환자분이 어느 향기가 맘에 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능하면 그녀가 말하는 그 (둘 중 어느 향인지 알 수 없지만) 향수를 선택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점심시간 내내 고민했던 딸은, 묘책을 생각해 낸다. 작은 종이 두 개에 자신이 아침에 뿌렸던 각각의 향수를 따로 뿌린 후 잔향을 남기고, 그 밑에 각각 향수 이름을 써서 그녀 병실로 다시 갔다. 그러고는 두 개의 향을 따로 맡아 보시고 맘에 드는 향수를 사시면 될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는 것이다. 환자분은 몹시 기뻐하면서 그 메모를 한 손에 꼭 쥐며 반드시 이번에 병원 나가면 제일 먼저 꼭 그 향수부터 사러 갈 거라고 다짐하며 해맑게 웃었다. 그 말끝에 딸이 한마디 더 내게 들려준다.

“엄마, 내가 향수를 직접 사다 선물로 드릴 수도 있는데, 그것보다는 그분께, 하루라도 얼른 퇴원해서 향수를 사러 가는 행복을 남겨드리고 싶었어. 지금은 아프지만 그 환자분도 여자잖아. 얼른 치료받고 다 나으면 머리도 다시 기르고 화장도 하고 향수도 뿌리고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 하루빨리 회복하시고 멋지게 쇼핑도 하시고 그 향수 꼭 사세요.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할 거라고. 얼른 나가서 향수 사고 싶다고. 꼭 회복하고 나가서 그 향수 살 거라고 하더라고. 내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며 자꾸만 환하게 웃는데 그 미소가 너무 눈부셨어. 그동안 아파서 찡그리고 힘들어하던 모습에서 미소로 변한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어.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그런 사소한 일로도 환자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는 것을 느꼈어.”

딸의 말을 들으며,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동안 내 가족과 내 이웃에게 얼마나 향기로운 사람이었을까? 돌아보니 부끄러울 만큼 향기롭지 못했던 때가 많았다.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다.

나무와 풀에 꽃향기가 언어라면, 우리 인간은 입에 담는 저마다의 말이 꽃향기가 아닐까 싶다. [사진 Pixabay]

나무와 풀에 꽃향기가 언어라면, 우리 인간은 입에 담는 저마다의 말이 꽃향기가 아닐까 싶다. [사진 Pixabay]

얼마 전부터 나의 남편과 친구 몇이 태안에다 작은 주말농장을 시작했다. 지난 주말에 처음 나도 다녀왔다. 그곳 야산에서 노랗게 핀 생강나무 꽃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아보니 향기가 무척이나 좋았고 그윽했다. 작고 초라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잡목이었다. 이런 나무들도 누가 보든 안 보든 저마다의 향기를 품고 이렇게 세상을 사는구나 생각하니 그 나무가 다시 보였다. 잠시 꽃을 바라보다 다시 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한참 후에도 차 안에서 그 잔향이 떠다녔다. 새끼손톱보다 작았던 그 꽃을 잠시 만졌던 것뿐인데 향기는 그 후로도 오래 나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나무와 풀에 꽃향기가 언어라면, 우리 인간은 입에 담는 저마다의 말이 꽃향기가 아닐까 싶다. 말 한마디로도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요즘 가뜩이나 좋지 않은 경기에 신종 전염병까지 겹쳐 서로에게 벽이 생기고 우리 마음을 탈진에 이르게 하고 있다. 사는 게 힘들다 보니 작은 일에도 너나없이 쉽게 예민해지는 날들이다. 전염병 공포와 지독한 경기불황이지만, 그래도 우리 서로서로 향기로운 말로 다독이며 이 봄을 건너 가보면 어떨까. 언어로 꽃피우기, 나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작은 야산에 피웠던 그 꽃처럼, 그리고 어느 간호사의 작지만 향긋한 행동처럼.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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