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저희는 약하니 버리지 마시옵소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유자효 시인

유자효 시인

코로나바이러스에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습니다. 아내와 함께 찾아본 집 근처 산에는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납니다. 신록의 여린 잎들은 마치 아기처럼 앙증맞습니다. 모처럼 봄기운을 가슴 깊이 들이마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의 데이트였습니다. 연애 시절에는 그리움에 안달복달했었건만, 결혼 이후 아내와의 대화는 생활적인 것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무려 반세기 만에 찾게 해준 것이 이 듣도 보도 못했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였습니다.

바이러스가 주고 빼앗아간 것들 #서양 문명의 전락 보는듯한 충격 #세상은 이렇게 멈춰 설 수도 있다

저는 손을 참 좋아합니다. 꼭 잡은 연인의 손. 고사리 같은, 꼬물거리는 우윳빛 손가락 아기의 손. ‘나마스테’ 하며 합장하는 네팔인의 손. 기도하는 소녀의 손. 노동의 거친 손. 고단했던 삶의 역정을 보여주듯 관절염으로 일그러진 할머니의 손까지도…. 그런데 이 아름다운 손이 코로나19의 최대 감염원이라니 기가 막힙니다. 전철 손잡이도, 엘리베이터 버튼도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손을 경계해야 하는 세상은 제게 아름다움 하나를 앗아가 버렸습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제가 하고 싶었던 삶은 글만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시절 몇 년을 제외하고는 그런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송기자라는 직업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현실적 삶이라는 채찍이 늘 저를 후려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음 듣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저를 명실상부한 전업 작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도리없이 제가 소년 적부터 꿈꾸어오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바이러스라는 막강한 존재가 그동안 제가 일상이라고 여겨오던 사회적 생활을 강제로 차단해버리고 선택의 여지 없이 집안으로 밀어 넣어준 덕분입니다.

중학교 진학 이후 저는 서구적 세계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미술 시간에 배운 것은 서양미술사였습니다. 이집트 문명부터 에게해 문명, 그리스·로마 문명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 지식의 많은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서양입니다. 음악도 바하, 헨델,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바그너 등 헤일 수 없이 많은 서양의 음악가들이 저의 스승이었습니다. 파리 특파원 시절과 숱한 여행을 통해 보아온 서양의 건축과 조각품들은 저의 로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서양은 저를 경악게 합니다. 미국이, 이탈리아가, 스페인이, 독일이, 영국이 어떤 나라들인데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가고 있는 것입니까? 텅 빈 거리, 슈퍼마켓에서의 싹쓸이 식품 사재기, 화장지를 훔쳐 나오는 사람. 의료 선진국이라고 생각해오던 그 나라들이 제대로 된 진단과 치료는커녕 시신 처리마저 쫓기는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며 거대한 문명의 전락을 보는 듯합니다.

저는 이 병으로 존엄한 죽음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슬퍼합니다. 가족마저 만나지 못한 채 맞이해야 하는 삶의 최후.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냉동 트럭으로 수십 구씩 옮겨지고, 가족의 참례마저 허락되지 않은 채 소각되어 버리는 시신. 중국 후베이성의 봉쇄가 풀리자 화장된 가족의 유골을 전달받기 위해 묵묵히 줄지어 기다리는 행렬은 바이러스가 그려낸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이 바이러스는 BC(Before Corona)와 AD(After Disease)로 시간을 가를 것이 분명합니다. AD의 시대는 비대면 온라인이 대세가 될 것입니다. 사람이 직접 얼굴을 맞대야 하는 일들은 구시대적 유산이 될 것입니다. AI(인공지능)와 인터넷 관련 업종 그리고 재택근무 등이 주류가 될 것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지휘하는 두뇌(Brain)와 단순 작업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계층으로 이분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같은 국경 없는 사이버 공간을 이용한 신종 범죄의 창궐에 대비해야 합니다.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닙니다. 다른 생명체와 함께 살아야 하는 약한 존재일 따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비 내리는 텅 빈 성 베드로 광장에서 홀로 기도했습니다. “저희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연약하고 길 잃은 사람들이니 돌풍의 회오리 속에 버리지 말아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사순절 미사에서는 “모든 이들이 울고 있으며 나도 함께 울고 있고 우리 모두에게 눈물의 일요일”이라고 했습니다.

역병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조상들은 손님, 마마라고 불렀겠습니까? 바이러스는 인간 사회의 질서를 모릅니다. 따라서 평등합니다. 나라의 수반도, 왕족도, 세계적인 스타들도 예외가 되지 못합니다. 내전도, 매연도 일거에 해결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멈춰 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에게 던지는 교훈일 것입니다.

유자효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