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청장 보좌 직원 두 얼굴···'53억 사기 의혹' 정읍 뒤집어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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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전북 정읍시 수성동 전주지검 정읍지청 전경. 김준희 기자

지난 25일 전북 정읍시 수성동 전주지검 정읍지청 전경. 김준희 기자

"황당하고, 허망하다."

[사건추적] #전주지검 정읍지청장 부속실 30대 실무관 #15명 "53억 부동산 투자 사기" 경찰 고소 #동료들도 2억 빌려줘…아무도 의심 안해 #김우석 지청장 "송구하고 창피하다" #"착실하고 일 잘해…우리도 속아" 토로 #경찰, 수사 착수…"돌려 막기 의심"

 지난 25일 오후 전북 정읍시 수성동 전주지검 정읍지청. 청사 2층 집무실에서 만난 김우석 정읍지청장은 "우리 직원 때문에 외부 사람들이 피해를 본 것 자체가 송구하고 창피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정읍지청에서 근무하던 8급 실무관 A씨(여·30대 후반)가 50억원이 넘는 사기 사건 가해자로 지목돼 경찰 수사 대상에 올라서다.

 더구나 A씨는 며칠 전까지 정읍지청장 부속실에서 김 지청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직원이다. 이날 부속실 A씨 자리는 비어 있었다.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검찰은 A씨의 비위가 무겁다고 보고 직위 해제했다.

 김 지청장은 "우리 직원들도 피해를 많이 본 상황이라 직원들에게 미안하고 볼 면목도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정읍지청은 말 그대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속칭 나쁜 놈을 잡는 검찰에서 수사관은 아니지만 현직 직원이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정읍경찰서에 따르면 A씨는 '고수익을 보장한다'고 지인들을 속여 수십억원을 가로챈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사기)로 불구속 입건된 상태다. A씨는 지난해 5월부터 최근까지 지인 15명에게 고수익을 미끼로 부동산 투자금 명목으로 53억8000만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피해자들이 지난 20일 "A씨가 투자금을 받아 편취했다"며 경찰에 고소장을 내면서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A씨는 '법무법인(로펌)에서 부동산 투자를 한다. 여기에 투자하면 고수익이 보장된다" "부장검사 출신이 로펌을 차렸다" 등의 거짓말로 지인들을 속였다고 한다. 경찰 안팎에서는 '25억원을 빌려준 피해자도 있다' '실제 피해 규모는 70억원이 넘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검찰 동료 일부도 A씨에게 돈을 빌려준 것으로 파악됐다. 10명에 가까운 정읍지청 직원이 A씨에게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을 빌려 줬고, 금액은 모두 2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동료들에게는 투자가 아닌 다른 용도로 급한 사정을 얘기하면서 '며칠만 쓰고 주겠다'며 돈을 빌렸다고 한다. 직원 일부는 가족 몰래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돈을 마련해 준 것으로 전해졌다.

 전주지검 정읍지청 1층 로비 안내판. 김준희 기자

전주지검 정읍지청 1층 로비 안내판. 김준희 기자

 정읍지청 직원 절반 가까이가 A씨로부터 급전 부탁을 받았으나 상당수는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돈을 떼일 위기에 놓인 직원들은 A씨를 고소할지 고심하고 있다고 한다. A씨는 지인들에게 받은 돈 대부분을 주식에 투자했다가 날린 것으로 전해졌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A씨는 어떻게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50억원이 넘는 거액을 끌어모을 수 있었을까. A씨의 '검찰 공무원' 신분과 고향인 정읍에서 그가 오랫동안 쌓아온 좋은 평판이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A씨는 검찰에서 약 14년간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4년 전쯤 전주지검에서 정읍지청에 왔다고 한다. A씨는 기록을 만들고 나르는 행정 보조 업무를 했다. A씨 남편도 다른 지역 검찰청 소속 현직 검찰 수사관이다.

 피해자들은 투자금을 모은 사람이 현직 검찰 직원인 데다 처음에는 A씨가 시중 금리보다 훨씬 높은 이자를 지급해 '설마 검찰 직원이 사기를 치겠느냐' '떼돈 벌겠다' '지역에서 A씨만큼 신분 확실한 사람이 어디 있냐'며 A씨를 철석같이 믿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피해자들은 A씨가 말한 법무법인이 실제 존재하는지 확인해 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 일부가 뒤늦게 통장을 확인해 보니 매달 A씨로부터 꼬박꼬박 들어오던 이자가 몇 달째 밀린 사실을 알고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피해자 중 한 여성이 지난 18일 'A씨와 연락이 안 된다'며 정읍지청에 찾아오기 전까지 직원 아무도 A씨가 여기저기서 돈을 빌린 줄 몰랐다고 한다. 이날 A씨는 연차 휴가를 냈다. 김 지청장도 이날에야 A씨가 지인과 직장 동료들에게 거액의 돈을 빌린 사실을 확인하고, 대검에 보고했다.

전주지검 정읍지청 전경. 김준희 기자

전주지검 정읍지청 전경. 김준희 기자

 정읍지청 내부에서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는 원성이 높다. 김 지청장은 A씨에 대해 "착실하고 일도 정말 잘했다. 성품도 좋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청내에서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었다"고 했다. 이런 비유도 들었다. "직원들을 보면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 시키는 일도 안 하는 사람, 시키지 않은 일도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직원(A씨)은 시키지 않은 일도 성실히 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는 "외부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도 (A씨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의 거짓말에 대해) 크로스 체크(대조 검토)를 안 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처음에 피해자가 찾아 왔을 때도 그 직원을 의심하지 않았다. 되레 사기를 당한 줄 알았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김 지청장은 "우리(검찰 동료들)한테도 뻥치고(거짓말하고), 그쪽(외부 지인들)한테도 뻥쳤다. 검찰 다니는 걸 그런 식으로 써먹었다"며 A씨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했다. 그는 인터뷰에 응한 이유에 대해 "우리 직원이 돈을 빌리면서 검찰을 팔았다고 해서 바깥에서 검찰 직원 전체를 한통속으로 보는 것 같아 '우리도 속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A씨 남편도 아내가 50억원대 사기 사건에 휘말린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안팎에서는 "A씨 남편은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직원인데, 뒤늦게 아내 사건을 알고 황당해한다"는 후문이 나돈다.

 정읍경찰서 관계자는 "A씨가 '돌려막기'를 한 것 같다. 피해자에게 준 이자도 제각각"이라며 "피해자 조사가 끝나는 대로 A씨를 불러 조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읍=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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