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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근영의 숨은그림찾기

그래도 꽃은 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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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23면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

봄이 와도 설악산엔 여전히 눈이 쌓여 있고 나뭇가지는 앙상합니다. 새파란 하늘, 삐죽삐죽 검은 바위, 잔설 위에 제일 먼저 피어나는 건 진달래입니다. 겨울을 견뎌낸 사람의 눈엔 그 분홍색마저 고맙고 대견해 보일 터, 화가 김종학(83)은 “색깔을 내기 위해 직접 꽃잎을 따다가 화면에 갖다 대 보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고 돌아봤습니다.

1979년 10월, 김종학은 가정으로부터, 화단으로부터 도망쳐 설악산에 파묻혔습니다. 마흔둘, 화가로도 이름을 얻지 못했고 가장으로도 실패했습니다. 41년 전 설악산 가는 길은 지금과 달리 좁고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했을 텐데, 그렇게 들어간 설악산에서 김종학은 석 달 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등지려 폭포에도 올랐다고 했습니다. 부모의 이혼에 충격받은 사춘기 딸에게 후에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좋은 그림 백 장도 못 남기면 너희들이 커서 우리 아빤 화가였는데 그림도 몇 장 못 그린 시시한 인간이었구나 비난받으면…백 장만이라도 그릴 때까지 억지로라도 살자며 입술을 깨물고 그림을 그린 것이 오늘날 나비·꽃 그림들이 나오게 됐단다.”(『김종학의 편지』, 마로니에북스)

김종학, No. 13, 2006, 캔버스에 아크릴릭, 91X29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김종학, No. 13, 2006, 캔버스에 아크릴릭, 91X29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그림 백 장을 못 그린 덕에 살 수 있었던 그는 봄이 오자 주위에서 볼 수 있던 자연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노란 할미꽃, 달밤에 고고한 박꽃, 이른 아침 나팔꽃, 쏟아지는 폭포 옆 녹음, 눈 쌓인 설악산의 소나무…. 세상에서 추방당한 화가에게도 자연은 한결같았고, 김종학은 거기서 소생할 힘을 얻었습니다.

극장엔 신작이 사라졌고, 공연장과 경기장엔 이제 관객도 함성도 없습니다. 한산해진 지하철과 식당도 반갑지 않습니다. 퇴근 후 친구나 동료와 맥주 한 잔 기울이던 일상도 아득합니다. 당연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졸지에 추방당했지만, 그래도 봄은 옵니다. 많은 일들이 불확실해졌지만 비상한 상황은 언젠가 끝난다는 것, 그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때, 잃었던 일상이 새롭게 빛나길 기다립니다.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