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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3~4일씩 빨아 써요" 코로나에 신음하는 은행원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달 28일 오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서울 영등포구 수출입은행 본점에서 비상근무를 위해 출근한 관계자가 방호복을 입고 있다. 뉴스1

지난달 28일 오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서울 영등포구 수출입은행 본점에서 비상근무를 위해 출근한 관계자가 방호복을 입고 있다. 뉴스1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는 가운데, 전국 영업점에서 불특정 다수 고객을 대면하는 은행원들의 불안감도 커진다. 본점으로부터 마스크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은행원들이 적지 않아서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는 '은행 지점 직원들의 단축 근무를 시행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와 1만 건 가까운 동의를 얻었다.

"마스크 왜 안 주나" 본사에 항의도 

3일 서울 시내 한 신한은행 지점에서 근무하는 직원 A씨는 본사로부터 마스크조차 공급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점 상사가 왜 마스크를 안 주냐고 항의도 해봤지만 본사에선 "대구 등 당장 급한 지역과 고객이 많은 지역 내 지점에 마스크를 우선 배분하고 있다, 기다려달라"고만 했다.

A씨는 "자비로 마스크를 사서 쓰는데, 그마저도 넉넉하지 못한 직원들은 마스크 하나를 빨아서 3~4일씩 쓰는 형편"이라며 "하나로마트에서 공적 마스크를 판다고 하는데 지점에 발 묶인 은행원들이 몇 시간씩 줄을 설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담당 부서에 따르면 지난 1월 30일 이후 매주 전 지점에 한 사람당 5개씩(1일 1개)의 마스크를 배포하고 있다"며 "특정 지점에 마스크가 배포되지 않았다면 왜 그런지 그 이유를 확인해보겠다"고 말했다.

지난 1월 28일 신한은행 본점(소공점) 직원 출입구에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에 대비하기 위해 열화상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우상조 기자

지난 1월 28일 신한은행 본점(소공점) 직원 출입구에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에 대비하기 위해 열화상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우상조 기자

하나은행 직원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경기도 내 한 하나은행 지점에서 근무하는 B씨는 "코로나 사태 한 달이 넘도록 우리 지점 직원들은 본사로부터 1인당 총 2개의 마스크를 받은 게 전부"라고 말했다.

이어 "일반 기업은 확진자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해당 기업 내 감염 여부만 걱정하면 되는데 워낙 다양한 사람들을 대면하는 은행 지점은 얘기가 다르지 않나"라며 "직원 한 명이 감염될 경우 사회적 파장이 클 텐데도 본사는 영업점이 많다는 핑계로 제대로 된 대처를 못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마스크 있어도 불안…국민청원도 떴다 

마스크가 배급된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본사로부터 1명당 20개씩의 마스크를 받았다는 국민은행의 한 영업점 직원 C씨는 "마스크를 하루 종일 쓰고 일하다 보니 습기가 차고 숨쉬기가 불편한 데다 고객들에게 목소리가 제대로 닿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숨을 쉬고 싶어서 고객이 없을 때 잠깐 마스크를 내렸다가 고객이 오면 바로 올려 쓰곤 한다"고 말했다.

매일 다양한 고객들을 대면해야 한다는 불안감도 크다. 서울 시내 한 농협은행 지점에서 근무하는 D씨는 "상황이 심각해졌는데도 평소처럼 고객을 마주 대하고, 서류나 볼펜 등을 전달하면서 접촉이 불가피해 불안감이 없지 않다"며 "최근엔 은행 물품을 못 믿고 개인 볼펜을 가지고 다니는 고객들이 생기기도 했다"고 말했다.

D씨 사정은 그나마 낫다. 농협은행은 이번 주부터 영업점마다 직원의 20%를 하루 단위로 돌아가며 재택근무하게 하고 있다. 영업점 전 직원이 일주일(5영업일) 중 하루씩은 재택근무를 하는 셈이다.

하지만 대부분 은행은 영업점이 아닌 본점 직원 가운데 원격근무가 가능한 일부 인원에 한해서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있다. 3일 오후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은행 지점 직원들의 단축 근무를 시행해달라"는 내용의 게시글이 올라와 1만명 가까운 동의를 얻고 있다.

지난달 26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청원 게시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은행원들의 감염이 늘고 있다"며 "은행 지점 직원들의 단축근무를 시행해달라"고 써있다. 국민청원 캡처

지난달 26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청원 게시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은행원들의 감염이 늘고 있다"며 "은행 지점 직원들의 단축근무를 시행해달라"고 써있다. 국민청원 캡처

대면 어려워서…대출 등 업무 '부실' 불가피 

코로나19 우려에 외부인 접촉을 줄이는 기업이 늘면서 은행 영업점에서 기업 담당 업무를 하는 직원들의 업무처리 때 고충도 커졌다. 기업 여신을 취급하는 직원들은 "자서(자필서명)를 제대로 안 받고 업무를 처리하는 경우가 늘 수밖에 없어 불안하다"고 한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서울의 기업은행 한 지점서 근무하는 직원 E씨는 "거래기업 중 중국 관련 사업을 하는 업체의 대표가 코로나19 때문에 중국에서 돌아오질 못해 사실상 '자서(자필서명)'가 필수인 대출 연장이 불가능한 경우가 생겼다"며 "거래 관계를 오래 맺어온 기업들의 경우 '사장님 돌아오면 바로 서명하자'고 약속하고 그냥 연장을 처리해버리는 사례가 심심찮게 있다"고 말했다.

개인고객도 마찬가지다. 서울의 한 우리은행 지점에 근무하는 프라이빗뱅커(PB)는 "펀드 가입이나 수신 업무는 며칠 미뤄져도 되지만 여신(대출)을 연장이 제때 안 돼 미뤄지면 연체이자, 신용등급 강등 문제가 발생한다"며 "코로나19 탓에 지점이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3월 또는 4월 대출만기가 돌아오는 고객에 만기 연장 서류에 미리 서명을 받아놓기도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은행 직원은 "젊은 직원들 사이에선 코로나19 감염보다 더 무서운 게 업무상 애로"라며 "현장에선 코로나로 인해 불가피하게 업무상 절차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일을 처리하려고 애쓰는데,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직원 개인에 대한 문책으로 돌아올까 두렵다"고 하소연했다.

정용환 기자 jeong.yonghwa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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