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자존심 숨긴 콜 전 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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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얼마 전 윤영관 서울대 교수가 이 정부의 외교 정책을 비판해 장안의 화제가 됐다. 그러면서 윤 교수는 성공한 자주 외교의 사례로 독일 통일 당시 헬무트 콜 총리의 외교를 꼽았다.

지금 생각해도 독일 통일에는 운도 따라주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통일은 기정사실이 됐다. 화폐는 어떤 비율로 교환하고, 제도나 법적 통합은 어떻게 이룰지 등에 대한 협상만 남았다. 독일 내부엔 별다른 걸림돌이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외부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승 4강의 승인을 얻어내는 게 관건이었다. 처음부터 통일을 지지한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이 반대했지만 우방인 이들은 설득이 쉬웠다. 문제는 동독에 38만 대군을 주둔시키고 있던 소련이었다. 콜 총리와 겐셔 외무장관이 모스크바로, 코카서스로 부단히 따라다니며 고르바초프를 설득했다. 결국 150억 마르크(100억 달러)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소련의 승인을 얻어냈다. 나아가 독일은 소련군이 귀국해 살 집까지 지어줬다. 이들이 못 나가겠다고 버티면 통일이고 뭐고 물 건너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보면 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은 운보다는 기회를 놓치지 않은 외교의 승리였다. 물론 서독의 동방정책과 이로 인한 인적.물적 교류 확대 등이 통일의 초석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베를린장벽 붕괴를 통일로 연결시킨 고리는 외부적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콜의 외교 역량이었다.

통일 1년 뒤 소련이 해체되자 콜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의 표현처럼 '그때 통일 열차를 타지 않았다면' 통일은 아예 불가능했거나, 지난(至難)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국제법상 러시아는 물론 나머지 15개 공화국의 승인을 일일이 받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이 독일에 어떤 요구를 했을지는 불문가지였다.

독일은 통일로 패전 후 45년 만에 주권을 완전 회복했다. 마침 그해 월드컵까지 우승해 독일의 기세는 욱일승천(旭日昇天) 그 자체였다. 통일재상이 된 콜로서도 우쭐할 만했다. 유럽 최강의 경제력에 통일까지 했으니 그에 걸맞은 국제적 지위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무렵(91년 1월) 걸프전이 발발했다. 미국이 주도한 이 전쟁에 콜은 시큰둥했다.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고, 전비 부담도 눈치만 살폈다. 당장 미국 조야가 들끓었다. "소련에 100억 달러를 주면서 우리에겐 성의 표시를 안 해?" 즉각 겐셔가 진사사절로 미국에 날아갔다. 그러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결국 콜이 직접 건너가 전비 지원을 약속했다. 결과적으로 걸프전 전비 761억 달러의 16%인 120억 달러를 독일이 댔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를 빼면 가장 많은 액수다. 그제서야 미국의 분노가 풀렸고, 듣기 좋은 소리도 나왔다. "독일은 변함 없는 미국의 우방이다."

독일이라고 자존심이 없겠는가. 자존심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게 그들이다. 그런데 왜? 다 국익을 위해서였다. 미국과의 동맹관계가 경제.외교적으로 이익이라 판단한 것이다. 잠시 우쭐대던 콜은 비싼 값을 치르고 교훈을 얻었다. 외교란 힘의 논리가 우선하는 냉엄한 현실이며, 국제정치에 힘의 진공상태는 없다는 사실을.

윤 교수가 콜의 외교를 성공한 자주 외교로 부른 것은 우리 외교와 극명히 대비되기 때문일 터다. 한마디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다. 물론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는 이 정부의 자세는 틀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양국관계가 과거보다 건강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외교엔 '안(못) 할 말'이 더 많다. "미국은 오류가 없는 국가냐, 북한 목이라도 조르란 말이냐"같은 논리 비약이 심한 거친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이는 외교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주 외교? 듣기는 좋다. 하지만 자존심과 국익은 보통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당시 독일이나 지금의 중국처럼 자존심쯤 잠시 접어도 된다.

유재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