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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요충지' 우한, 단 한번도 '수도'로 선택받지 못한 이유

중앙일보

입력

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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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낀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 The Conversation]

마스크를 낀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사진 The Conversation]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주목받고 있는 ‘우한(武汉)’, 한국 사람들에겐 생소할 수 있다. 명칭조차 낯선 사람들에게 삼국지의 ‘징저우(荆州; 형주)’라고 하면 바로 이해할 것이다. 이곳은 주변에 대도시가 몰려있고, 인구 밀도가 높은 곳으로 중국 역사상 ‘요충지’로 여겨졌다.

*대부분 지역 명칭과 사람 이름은 중국 병음 발음 표기법에 준했으나, 사람 이름의 경우 편의상 한국 한자 발음으로 표기하기도 함

교통의 중심

[사진 진르터우탸오]

[사진 진르터우탸오]

우한은 수운, 철도운송, 도로 및 항공 운송이 두루 발달된 곳이다. 중국에서는 찾기 어려운 운송 발달 지역인 셈이다. 예부터 사람들이 도시 주변을 흐르는 양쯔강을 타고 대도시로 이동했다. 무한은 양쯔강과 가장 큰 지류인 한수이강(본래 명칭은 ‘한강;汉江’이지만 통칭 ‘한수이;汉水’강으로 불림)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했다. 고대부터 형성된 편리한 교통 시스템 덕분에 우한은 ‘구성통구(九省通衢)*’라는 별칭도 얻게 되었다.

*구성통구(九省通衢): 9개의 성(省)을 연결하는 통로

우한(武汉)은 양쯔강과 한수이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사진 진르터우탸오]

우한(武汉)은 양쯔강과 한수이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사진 진르터우탸오]

마오쩌둥도 반한 '물의 도시'

강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우한에 도착한 외지인들은 마치 ‘물의 도시’와 같다고 표현한다. 양쯔강과 한수이강뿐 아니라 크고 작은 호수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우한 도시 안에만 무려 100개에 가까운 호수가 있어 사람들은 ‘백 개 호수의 도시(白湖之城)’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중에 대표 관광명소인 동호(东湖)는 중국에서 가장 큰 호수 중 하나이다. 중국 10대 명승지에 속하는 항저우(杭州) 서호(西湖)의 6배이다. 자연 경관도 무척 아름다워 마오쩌둥(毛泽东)이 그 경치를 극찬하며 64개국의 주요인사와 정무를 본 곳으로도 유명하다. 시진핑(习近平) 주석도 2018년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이곳에서 회담을 진행한 바 있다.

시진핑(习近平) 주석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사진 바이두바이커]

시진핑(习近平) 주석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사진 바이두바이커]

시진핑(习近平) 주석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사진 바이두바이커]

시진핑(习近平) 주석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사진 바이두바이커]

군사적 요충지

[사진 진르터우탸오]

[사진 진르터우탸오]

우한은 한커우(汉口), 한양(汉阳), 우창(武昌) 세 도시가 합쳐 이뤄졌다. 이 중 우창은 삼국지의 손권이 도읍으로 삼았다. 손권은 이곳에 전쟁에 대비하여 군사들의 전망대로 활용할 수 있는 황허루(黄鹤楼)를 짓기도 했다. 전망이 좋아 많은 시인들이 이 곳에 올라 시를 남기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시로 당나라 시인 최호가 남긴 ‘황허루(黃鶴樓)’가 있다. 근처에는 손권과 유비 연합군이 조조에 맞서 싸우던 ‘적벽(赤壁)’이 있다.

경제 중심지

당나라 이전까지 군사적 요충지로 쓰였다면, 통일 이후에는 점차 상업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주로 남쪽 상인들이 베이징 등 대도시로 가기 위해 이용하는 '물자 운송 중심지'로 발전했다. 당나라 말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상품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며 우한은 국가급 경제 중심도시로 거듭난다. 남송의 대시인 육유(陸遊)도 우한이 ‘항저우와 난징을 뛰어넘는 곳’이라 칭송할 정도였다.

우한은 1858년 개항 이후, 장지동(張之洞)을 중심으로 양무운동을 활발히 진행했던 도시이기도 하다. 우한을 중심으로 후베이 지역을 근대화하는 데 성공하여 공업이 번창하게 된다. 중국 최초의 근대식 제철소인 한양제철공장(汉阳铁厂)이 창설되었으며, 마오쩌둥 시대에는 대약진운동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이후 ‘동방의 시카고(미국의 대표 공업 중심 도시)’라 불리며 공업과 상업을 아우르는 대도시로 거듭났다. 1911년 신해혁명의 시발점이 된 우창봉기를 주도하여 한때 '혁명의 도시'라 불리기도 했다.

한양제철공장(汉阳铁厂) [사진 바이두바이커]

한양제철공장(汉阳铁厂) [사진 바이두바이커]

‘중부굴기’ 우한, 수도가 되지 못한 이유는?

편리한 교통을 바탕으로 상공업이 크게 발전한 우한은 왜 단 한 번도 수도가 되지 못 했던 것일까?

첫 번째 이유는 ‘홍수’이다. 우한의 전반적인 지형은 낮고, 한커우·한양·우창이 양쯔강에 의해 갈라져 있다. 폭우가 자주 오는 기후로도 유명하다. 도시의 강이나 호수가 범람하기 쉽다. 홍수에 매우 취약하여 수도의 선택지에서 밀려난 셈이다.

[사진 소후닷컴]

[사진 소후닷컴]

지리적 위치도 치명적인 단점이 되었다. 바둑의 '천원(天元)'과도 같은 내륙 중심이라는 점은 오히려 '방위에 취약하다'는 의미이다. 사방에서 적이 몰려오면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방이 모두 평지이고 험한 지형이 없어 공격을 쉽게 당하는 곳(四战之地)’이라 위험하다.

시대운을 타고나지 못한 까닭도 있다. 당나라와 송나라 이전에는 중국의 인구와 경제 활동 지역이 황하 유역에 집중되었다. 장강(양쯔강) 문명을 대표하는 초나라 때는 양쯔강의 서쪽 지역이 발달했다. 남송 이후 양쯔강을 중심으로 수자원 운송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우한의 지위가 상승하는 듯 했다. 안타깝게도 금나라와 원나라의 수도가 중도(현재의 베이징)에 정착하며 이후 우한의 지위는 후베이의 성도에 머물게 되었다.

우한(武汉) [사진 셔터스톡]

우한(武汉) [사진 셔터스톡]

글 차이나랩 이주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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