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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만 스쳐도 눈 흘기는 세상…이 또한 지나가리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29)

지난해 ‘기생충’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다. 좋아하는 감독 작품인데 제목이 별로라서 미뤄놨다.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어떤 내용인가 물어보니 모두 시큰둥하게 말했다. “권하고 싶지 않아. 내용이 별로 실감이 안 나고, 와 닿지도 않고, 뒤끝도 찝찝해.” 뒤끝이 찝찝하단 그 말에 제목을 정말 잘 지었구나 하고 웃었다. 지하방 없는 동네에서 살아온 사람은 실감이 안 나는 그 영화를 나는 네 번이나 보았다. 물론 시나리오 공부를 한답시고 보긴 했지만 볼 때마다 가슴이 찡해진 영화였다.

지하방 없는 동네에서 살아온 사람은 실감이 안 나는 영화 '기생충'을 나는 네 번이나 보았다. 영화 '기생충' 포스터.

지하방 없는 동네에서 살아온 사람은 실감이 안 나는 영화 '기생충'을 나는 네 번이나 보았다. 영화 '기생충' 포스터.

나도 그랬다. 서울에 정착해 살면서 지하에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으니까. 다행히 같은 전세금으로 두 배나 넓은 지하방보다 단칸방인 지상방에서 서울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작업장인 공장은 지하에 있어서 몇 번이나 물난리를 겪었다. 내가 겪어봐야 공감이 되고 이해가 된다.

밤새 안녕이라고 했던가. 코로나바이러스가 온 방송에 도배해도 별로 실감이 안 났는데 경북 안동에 나타났다. 많은 시간을 내보내는 재난 뉴스에, 멀쩡한 사람도 불안에 떨고 두통을 만들어낸다. 지난주엔 그래도 간간이 사람들과 만나 외식도 하고 만남이 있었지만 지금은 도서관, 종교기관, 목욕탕 등 모든 공공장소가 폐쇄됐다. 대문 밖을 나가면 눈치를 받고 오해를 받는다. 근무지인 도서관도 잠정 휴관되고 감옥 아닌 감옥에 갇힌 듯 답답해하는 나에게 대구 사는 동생이 핀잔하듯 말한다.

“마당 있는 집에 사는 사람이 그런 말 하면 어쩐대요. 좁은 아파트 혹은 원룸에서 격리되어 있어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봐. 다른 건 안 믿어도 질병 관리본부의 말은 그래도 좀 믿고 따라야지. 뉴스 잘 보고 당분간은 돌아다니지 마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 옛말이 옷깃만 스쳐도 잘못하면 번호로 호명되고 방문한 건물 이름이 오르내리니 서로 가까이하지 못하고 소통 없는 세상이 돼 버렸다. [중앙포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 옛말이 옷깃만 스쳐도 잘못하면 번호로 호명되고 방문한 건물 이름이 오르내리니 서로 가까이하지 못하고 소통 없는 세상이 돼 버렸다. [중앙포토]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다. 지인과 식당에서 밥도 못 먹는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던 옛말이 옷깃만 스쳐도 잘못하면 번호로 호명되고 방문한 건물 이름이 오르내리니 서로 가까이하지 못하고 소통 없는 세상이 돼 버렸다. 요즘 상영 중인 영화에서 불타고 있는 집을 바라보며 엄마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산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된다. 두 팔, 두 다리만 있다면 뭐든 한다. 6·25 때는 전국이 다 이랬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지금 한창 농사를 시작하려고 고추 싹을 키우는 농민은 더 큰 걱정이 인력수급이다. 동네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작은 컨테이너 방에서 노심초사 일할 날만 기다리며 지내고 있다. 동남아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미안할 것도 없는데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눈인사를 한다. 세찬 바람에도 이웃 사과밭에는 농부가 나무에 올라 전지에 여념이 없고 이른 농사를 시작하는 밭에도 거름을 내느라 바쁘다. 나도 뒷밭에 거름을 내며 시간을 죽인다. 밭일 가시는 어른이 거름을 펴는 내게 말로 거들며 지나간다.

“암만, 일은 해야제. 죽기 전까진 농사를 지어놔야 살아있는 사람이 안 굶제.”

얼마 전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가 기억난다. 참새가 길 한쪽에 발랑 뒤집어져서 발을 하늘로 향해 쭉 뻗고 누워 있었다. 지나가던 말이 물었다.

“왜 그러고 있니?”
“응, 뉴스에 곧 하늘이 무너진다며 모두 힘을 모으래. 그래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중이야."
"하하하. 네가 그러고 있다고 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미련한 것아."
"응, 도움이 되고 안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고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야."

세상일에 별 도움이 안 되지만 유머 속의 주인공 참새같이 최선을 다하는 나에게 작은 위로를 보낸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이 모든 상황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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