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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남편과 멋진 남편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26)  

며칠 전 여행길에 화병으로 마음치료중인 분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들어주기만 했는데 자기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웠다고 연락이 온다. 폭언, 폭력은 마음속 깊은 화가 주체하지 못하고 솟아오르는 힘이다. 화병을 꾹꾹 누르고 살다가 돌연사 하듯 죽는 사람도 봤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폭언과 폭력을 쓰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마는 당사자는 홧불을 끄려는 수단이려니 바라보던 옛날이야기를 해본다.

젊은 날 나의 친정은 조용한 가족이었다. 부모님이 술을 안 드시니 큰 목소리도 없었고 조용하게 물 흐르듯이 살았다. 어떤 일이 생겨도 조용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언젠가 아버지의 교통수단인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당신의 힘든 출근길보다 더 힘든 사람이 가져갔을 거라며 괜찮다고 하셨다. 자전거 앞뒤에 우리를 나눠 태우고 달리던 그 기분을 못 누릴 것 같은 아쉬움에 착하기만 한 아버지의 변명 같은 그 말이 싫었다.

택시 합승한 취객이 나에게 성희롱을 하자 남편은 앞 좌석 남자의 멱살을 잡고 파출소로 들어가 마구 두들겨 팼다. 그날 문득 '이 사람은 나를 어떠한 위험에서도 지켜주겠구나'하고 콩깍지가 씌워졌다. [사진 Pixnio]

택시 합승한 취객이 나에게 성희롱을 하자 남편은 앞 좌석 남자의 멱살을 잡고 파출소로 들어가 마구 두들겨 팼다. 그날 문득 '이 사람은 나를 어떠한 위험에서도 지켜주겠구나'하고 콩깍지가 씌워졌다. [사진 Pixnio]

반감이 솟아오를 시기에 친구가 자기 오빠를 소개해줬다. 요즘 말하는 ‘나쁜 남자’ 스타일이었다. 훔쳐간 자전거를 싸워서라도 찾아올 남자 같았다. 첫날 만남부터 음식점에서 시비가 붙어 싸우고, 술을 큰 잔에 부어 벌컥벌컥 마시는 모습도 멋졌다. 바보 같지만 어린 나이에 이런저런 남성다운? 모습이 좋았다.

일 년 만에 결혼했다, 자가용이 없던 때라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탔다. 그때는 합승이 기본인지라 앞자리에 술이 많이 취한 남자 손님이 탔는데 뒤를 돌아보며 나에게 요즘 사회문제가 된 성희롱을 했다. 그날 남편은 택시 안에서 앞 좌석 남자의 멱살을 잡고 파출소로 방향을 바꾸었다. 파출소에 들어서자마자 그 남자를 마구 두들겨 팼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경찰이 말리고 난리가 났다. 그 손님은 술이 점점 깨면서 사과했다. 그날 문득 ‘이 사람은 나를 어떠한 위험에서도 지켜주겠구나’란 유치한 느낌으로 콩깍지가 더 씌워졌다.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억울하고 힘들게 살아온 세월의 반항을 폭력으로 보여주었다. 화가 나면 울분을 참지 못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은 박살이 났다. 재떨이가 날아가고, 어느 땐 밥상이 두 동강 났다. 덩치 큰 경운기도 뒤집어졌다. 한번은 어머님이 이웃에서 유효기간이 지난 계란을 얻어왔다. 동네에 양계장이 많았다. 얻어온 계란이 스무 판쯤 된 것 같은데 그것을 한꺼번에 들어 벽에 던지니 노란색 하얀색 액체가 벽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풍경이다.

어느 날은 할머니가 칼국수를 밀었다. 뜨거운 칼국수 단지를 머리에 이어주며 밭으로 배달을 보냈다. 머리 밑이 터질 듯한 뜨거움을 참으며 살살 걸어 밭에 갔다. 멀리서 눈이 마주친 남편이 막 뛰어왔다.

머리 위에 올린 사과를 명중하는 무사의 모습같이, 단지만 돌려차기로 떨어뜨린 모습에 잠시 감탄했다. 부인에게 힘든 일을 시킨 항의이기도 했다. [사진 Pexels]

머리 위에 올린 사과를 명중하는 무사의 모습같이, 단지만 돌려차기로 떨어뜨린 모습에 잠시 감탄했다. 부인에게 힘든 일을 시킨 항의이기도 했다. [사진 Pexels]

국수단지를 받아주러 달려온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머리 위에 올린 그 단지가 박살 이 났다. 온 밭에 허연 국수 가락이 난장을 이루고 있었지만 머리 위에 올린 사과를 명중하는 무사의 모습같이, 단지만 돌려차기로 떨어뜨린 모습에 잠시 감탄했다. 부인에게 힘든 일을 시킨 항의이기도 했다. 그날 나의 밭 배달 일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그렇게 신혼 일 년의 시집살이는 남편 눈치살이가 되었다. 시부모님은 조용하고 마음이 여린 분들이셨으니 혼자 독학?으로 배운 폭력성과 욕설은 못 배운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키고 방어호신술로 충분히 쓸 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풍경은 영화같이 보일 때만 멋있지 삶에 들어온 그것은 매순간 불안하고 초조한 일상의 시간이었다.

파도치듯 살며 사건으로 인해 합의를 보고, 사과를 하러 경찰서로 재판장으로 다닌 횟수는 열 손가락을 다 채우고도 모자란다. 날마다 동분서주 뛰게 하던 남편이었지만, 40년 가까이 살면서 부인과 아이들에게는 단 한 번도 욕설은 물론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제 가족을 끌어안고 들개처럼 거친 인생을 살았지만 가족 안에서는 최고의 남자였다. 아이들이 아빠를 존경하고 자랑하며 그리워하는 이유다.

폭언과 폭력으로 직격탄을 맞은 마음의 상처는 해결이 되어도 오래도록 흉터가 남지만, 나를 떠나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해결만 하면 훗날 추억이 된다는 것도 알았다. 나름 성공한 인생이라고 떠들어 대는 나, 돈이, 재물이 없어도 살아갈 힘이 되어 주는, 미사일이 공중에서 분해되던 내 삶의 추억들이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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