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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정서 화투 치다 인사도 없이…구순 어르신의 작별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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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27)

지병이 있고 연로한 어르신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뉴스에 걱정이 많다. 죽음보다 공포가 두렵고, 죽음으로 가는 고통을 상상하면 더 두려운 것이다. 나이 많은 부모 생각에 나날이 걱정뿐인 지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계신다. 요즘은 면회도 제한돼 자주 못 찾아뵌다. 자신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돼 날마다 힘든 상황을 견뎌야 하는 것에 눈물이 난다고 했다. “아버지는 저런 모습으로 누워계시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그 말은 지금 숨만 쉬고 누워 있는 모든 이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죽는 날까지 아픔이 온전히 내 것이 돼, 내가 감당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것 또한 운명이다.

과거 내가 독거 어르신을 돌볼 때 만난 구순이 가까운 남자 어르신이 계셨다. 역사와 한문에 해박하시고 가끔 방문할 때면 혼자서 조용히 먹을 갈아 글을 쓰시는 모습은 경외심이 절로 들 만큼 품위 있었다. 가끔은 좋은 문장을 읽어주시고 풀이해 주시곤 했다. 모두 그분을 회장님, 회장님 하고 불렀다.

회장님이라 불리우던 그 분. 집밖에서 돌아가셔서 객사했다며 모두들 안타까워했지만 영혼은 가던 길을 쭉 가셨을 거란 생각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분이다. 걷다가 죽겠다는 말을 실천하신 것이다. [사진 Pixabay]

회장님이라 불리우던 그 분. 집밖에서 돌아가셔서 객사했다며 모두들 안타까워했지만 영혼은 가던 길을 쭉 가셨을 거란 생각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분이다. 걷다가 죽겠다는 말을 실천하신 것이다. [사진 Pixabay]

혼자 살던 그분은 젊은 사람도 흉내 못 낼만큼 주변 환경도, 몸도 깔끔하고 깨끗한 모습이었다. 지병이 있었지만 자식들이 걱정할까 봐 병원에 가도 입원치료를 안 하고 바로 돌아왔다. 당신의 병을 친구같이 아우르며 끌어안고 죽을 거라고 늘 말했다. 자식들도 자주 못 오게 했다. 쉬지 않고 움직였다. 가끔 지게에 나무를 지고 내려오다 어지러움에 휘청거리는 모습을 발견하고 걱정을 했지만 잠시 쉬면 괜찮다며 손을 내밀지 않았다. 돌아가신 날도 추운 겨울밤 마실을 나갔다가 농로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집 밖에서 객사했다며 모두 안타까워했지만, 영혼은 가던 길을 쭉 갔을 거라고 오랫동안 기억될 분이다. 그분은 걷다가 죽겠다는 말을 실천한 것이다.

지금 이웃에 사는 구순 어르신도 골골하면서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움직이셨다. 어지간한 아픔도 약초를 손수 캐고 말려 만든 조약으로 해결하고 병원행을 거부했다. 살 만큼 살았으니 자식들에게도 내가 알아서 집에서 죽는다고 큰소리쳤다. 허리만 조금 굽은 씩씩한 모습의 그 어르신은 모두 백이십 세까지 살 것이라고 농담했다. 죽음을 초조해하고 도망 다니면 무섭고 두렵지만, 친구와 이웃 마실 가듯 담담하게 대하면 무섭지 않은 것 같다. 그만큼 초연해지기까지는 하늘 가까운 길목까지 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구순이 넘는 어르신들이 노인정에 모여 십 원짜리 화투를 쳤다. 그분이 피곤하다며 한쪽에 비스듬히 드러누우셨단다. 아마 쓰러졌다는 말이 옳을지 모른다. 옆에 계시던 어르신이 “한숨 잘라나?”하고 물으며 이불을 꺼내 덮어주었다. 해가 질 때쯤 집에 가자고 깨우니 안 일어나더란다.

놀라 우왕좌왕하고 119가 출동하고 소란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모두 복 받은 친구라고 부러워했다. “잠결에 가는 바람에 같이 놀던 친구들에게 인사도 없이 갔다”며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죽음에 무심한 상태로 죽는 것이야말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최선의 길이라는 어느 글귀가 생각난다.

뉴스마다 우환 폐렴 환자와 스치기만 해도 곧 죽음이 덮칠 듯 공포를 조성한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떠들던 나도 마스크를 쓰고 마당을 서성거린다. 편안하게 죽음을 이야기하기엔 아직 더 살아내야 하는 나이인가 보다. 이 우환이 빨리 끝나길 기다린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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