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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사랑니만 남은 총살 미군의 유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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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진주현(40·고고미술사학) 박사는 미군의 파손된 머리뼈를 가리키며 ‘한때 살아 있던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진 박사는 하와이에 연구소를 둔 미국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 및 실종자 수색국(DPAA)’의 유해 감식 요원이다. DPAA엔 6·25 때 한국전에 참전했다 사망한 미군 유해가 많다. 그들은 진주현 박사 같은 조사원들의 신원 확인을 기다리고 있다. 백색의 머리뼈는 오른쪽 관자놀이로 총알이 들어가 입가를 부수고 앞쪽으로 빠져나간 흔적이 뚜렷했다.

유해감식단 진주현 박사가 발견 #이건수 회장, 미 노병의 고통 풀어 #국가는 때로 개인에게 희생 요구

“한때 살아 있던 사람의 이 치아를 보시죠. 사랑니가 막 나고 있지 않습니까. 스무 살이 채 안 된 청년인 것 같습니다.” 진 박사는 미군 청년이 중공(중국 공산당)군이나 북한군의 포로였으며 무릎을 꿇린 채 정조준된 권총에 의해 사살당한 것으로 추정했다. 10대 후반의 미군은 한국이란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붙어 있는지, 왜 그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는지 미처 알기도 전에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꽃다운 청춘을 남의 나라 땅에 묻은 사람의 사랑니를 관찰하면서 나는 터져나오는 슬픔을 삼켜야 했다. 그의 머리에 차가운 총구가 닿았을 때 젊은이는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 전쟁 중 이처럼 한국 땅에서 죽은 미국 군인이 3만7000명이라는데….

DPAA를 취재하는 한미클럽 소속의 한국 기자 일행은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국적이 다른 한때 살아 있던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들이 중국과 북한으로부터 소멸 위기에 놓였던 한국인의 나라를 지켜 주었다.

슬프게 ‘죽은 미군’이 있다면 트라우마에 젖은 ‘80대 노병’도 있었다. 노병은 하와이에서 만난 비즈니스맨 이건수(78·동아일렉콤 대표) 회장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람이다. 이 회장의 고향은 신의주. 그의 부모님은 해방 당시 공산당의 선동으로 사유재산을 몰수하려는 인민들의 살해 위협을 피해 월남했다. 6·25가 나던 때 이건수는 여덟 살이었다. 이 회장은 지금까지 200억원가량 사회적 기부와 한·미 동맹을 위한 민간 활동으로 꽤 알려진 인사다.

그는 2010년 텍사스 출신 참전 용사들을 댈러스로 초청해 잔치를 베풀었다. 조수미 등 세계적으로 저명한 한국 가수들의 음반을 선물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그때 “당신들의 헌신과 당신들의 동료 희생으로 공산당의 나라가 될 뻔한 한국이 구원을 받았다. 오늘날 당신들을 대접할 정도로 이렇게 번영한 나라가 되었다”고 말했다. 부부 동반한 80대 예비역 미군이 이건수 회장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사례를 했다는데 고마워한 이유가 남달랐다.

“지난 59년간 전쟁의 상처에 시달렸다. 포병으로 경기도 가평 전투에 참여했다. 적병의 시신을 4000여 구 수습해 묻었다. 그중엔 철사줄로 발이 묶인 열네 살짜리 소년군도 있었다. 코뮤니스트들이 하는 짓이 이렇다. 오늘 당신을 보니 내가 왜 싸웠는지 분명하게 이유를 알게 됐다. 이제부터 잠을 편안하게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진주현의 발견과 이건수의 체험을 들으면서 산 자와 죽은 자, 죽은 자와 죽인 자들이 품었던 은혜와 감사, 공포와 아픔이 가슴을 스쳐 갔다. 감정들은 각각이면서 서로 연결되었다. 감정을 관통하는 여러 진실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국가를 떠난 개인의 삶은 상상할 수 없다. 국가에 비하면 민족이나 인류는 부차적이다. 개인은 때로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와 투쟁한다. 그러다가도 공동체가 생존을 위해 생명을 요구하면 개인들은 피를 바친다. 허약하거나 가난하거나 무능한 나라의 개인은 너나없이 모두 비참하다. 당장 코로나 병원체만 해도 국가를 경계로 불행한 개인과 구원된 개인을 가르고 있다. 병원체엔 국경이 없지만 환자에겐 국경이 있다. 사랑니 미군의 유해와 80대 미군 노병의 눈물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었다. 〈하와이에서〉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