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의혹' 13인 공소장 공개 거부···추미애, 盧정부 원칙 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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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법무부 장관 [연합뉴스]

추미애 법무부 장관 [연합뉴스]

법무부가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사건’ 이후 공소장 대신 공소 요지만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4일 밝혔다. 범죄로 의심되는 사실 관계가 상세하게 드러난 ‘공소장’이 아닌 간략하게 요약된 ‘공소요지’ 형태로만 알리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공소요지’라는 형태 자체가 전례 없다 보니 검찰 수사가 청와대를 정조준하자 법무부가 앞장서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한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다만 법무부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역시 헌법상 보장된 권리라는 입장이다.

秋 법무부 “사생활 등 고려…앞으로도 공개 안 해” 

법무부는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제출을 요구한 청와대의 6·13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사건 피의자 13명에 대한 공소장을 제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근거로는 “형사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사건관계인의 명예 및 사생활 보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 사건의 경우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아직 재판에 넘겨지지 않은 피의자들에 대한 피의사실 공표 가능성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2018년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과 관련해 30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2018년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과 관련해 30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같은 결정의 배경에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 결심이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한다. 1월 중순 검찰 인사 이후 추 장관은 피의 사실 공표 문제와 공정하게 재판 받을 권리 등을 깊이 고민했다고 전해진다. 일부 참모들은 공소장 비공개를 강행할 경우에 부작용이 클 것이라는 우려도 나타냈다고 한다. 결국 치열한 토론이 이어졌고 ‘공소장’ 대신 ‘공소요지’를 제출하는 방법으로 결론이 났다.

검찰 안팎 “靑 조준하자 노무현 정부 때 원칙 바꿨나”

검찰 안팎에서는 법무부가 공소장에 담긴 사실 관계가 청와대를 겨누자 공소요지만 공개하는 ‘우회로’를 택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온다. 청와대를 감싸기 위해 현 정권의 선거 범죄 혐의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다만 법무부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역시 헌법상 보장된 권리라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한 현직 검사는 “2005년 5월 노무현 정부 때부터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공소장이 공개돼 왔다”며 “알 권리를 무시한 악수(惡手) 중의 악수(惡手)”라고 비판했다.

상위법 위반 소지가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선 국회법 128조와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제4조에 따르면 국가기관은 국회의 자료 요구 시 군사·외교·대북 관계에 관한 국가기밀이 아닌 경우 자료제출에 응해야 한다. 그러나 법무부는 이보다 하위법인 ‘형사사건 공개금지’ 훈령을 근거로 삼고 있다.

시행 시기 역시 의심스럽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앞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은 공소장이 모두 공개됐는데 4월 총선을 앞두고 청와대 관련 사건이 터지자 갑작스레 새로운 기준이 적용됐다는 것이다. 한 판사는 “(이 사건은) 일부 무죄만 선고돼도 정권에 치명상을 입힐 사건”이라며 “(이번 법무부 결정은) 한탄스럽다”고 말했다.

검찰이 29일 송철호 울산시장(왼쪽 윗줄부터)과 송병기 전 울산시 경제부시장, 황운하 전 울산지방경찰청장, 백원우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박형철 전 반부패비서관, 한병도(53)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 13명을 재판에 넘겼다. [연합뉴스]

검찰이 29일 송철호 울산시장(왼쪽 윗줄부터)과 송병기 전 울산시 경제부시장, 황운하 전 울산지방경찰청장, 백원우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박형철 전 반부패비서관, 한병도(53)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 13명을 재판에 넘겼다. [연합뉴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도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체 공소장에 뭐가 적혔길래 이 호들갑을 떨까”라며 “법무장관부터 법을 어기는 것을 보니 정권이 확실히 막장으로 가는 듯하다”고 적었다. 그는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안이 심각한 모양”이라며 “손바닥으로 가려질 하늘이 아니거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총선 끝날 때까지 묻어두겠다는 속셈인 듯”이라고도 썼다.

70여장 ‘공소장’엔 어떤 얘기

검찰이 법무부에 제출한 공소장에는 현직 송철호 울산시장이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기현 당시 울산시장에 대한 수사를 황운하 당시 울산지방경찰청장에게 청탁한 경위와 백원우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관이 관련 첩보를 경찰에 내려보낸 과정 등이 담겨있다고 한다. 특히 송 시장이 6·13 지방선거 때 내세운 공공병원 유치 공약 등이 청와대의 도움으로 마련됐다는 게 검찰 수사 결과였다. 청와대가 직접 나서 송 시장의 더불어민주당 당내 경쟁자를 정리하려 한 과정도 적혀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검찰이 지난 울산시장 선거를 청와대가 문재인 대통령과 30년 지기인 송 시장 당선을 위해 경찰 등 관계 기관과 합심해 벌인 ‘당선 프로젝트’ 이자 ‘부정선거’로 본 근거가 공소장에 상세히 서술돼 있을 거란 얘기가 많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이었던 2014년 7월 울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던 송철호(왼쪽) 울산시장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이었던 2014년 7월 울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던 송철호(왼쪽) 울산시장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엿새만에 낸 ‘공소요지’는

그러나 이날 법무부는 70여장에 달하는 공소장 전문 대신 4장 분량의 공소사실 요지만 담긴 자료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 역시 엿새 동안 공소장을 국회에 내지 않고 있다가 이날 공소장 대신 공소요지를 제출한 것이다. 그간 법무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최강욱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등이 기소됐을 때도 기소 1~2일 내에 공소장을 국회에 넘겼다. 법무부는 이날 오후 대검에 공소장이 아닌 공소요지만 제출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김수민·김민상·이가영 기자 kim.sumin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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