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성장률 18년 만에 반토막…투자 못 살리면 1%대 초읽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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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잠재성장률이 2%대 초·중반대로 떨어졌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분석이 나왔다. 잠재성장률은 노동력, 자본과 같은 생산 요소를 최대한 활용해 경기 과열을 초래하지 않고 이뤄낼 수 있는 성장률이다. 국가 경제의 기초 체력을 보여준다.

약골로 변한 한국경제 기초체력 #OECD 추산 2002년 5%→올 2.5% #재정 풀어 작년 2% 성장 맞췄지만 #부가가치 창출 미미해 속병만 커져 #이미 생산 둔화, 재고 급증 ‘빨간불’

뚝뚝 떨어지는 한국 잠재성장률. 그래픽=신재민 기자

뚝뚝 떨어지는 한국 잠재성장률. 그래픽=신재민 기자

28일 OECD에 따르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올해 2.5%로 추산됐다. 1년 전(2.7%)보다 0.2%포인트 떨어졌다. 10년 전인 2010년(3.9%)에 비하면 1.4%포인트 낮은 수치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09년 3.8%로 처음 3%대로 떨어진 이후 2018년에 2.9%로 낮아지며 2%대로 들어섰다. 이후로도 하락세는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와 올해 각각 전년 대비 0.2%포인트씩 낮아졌다. 내년 잠재성장률 추산치도 2.4%로 올해보다 0.1%포인트 낮다. 잠재성장률이 3%대에서 2%대로 내려앉는 데 9년(2009∼2018년)이 걸렸는데, 2%대에서 1%대로 떨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이보다 짧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인구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혁신 부진, 서비스업 생산성 정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하락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15∼64세 생산연령인구는 2017년을 기점으로 계속해서 줄어들 전망이다. 한국 경제의 생산성 향상 속도도 느려지고 있다. 미국 경제연구기관인 콘퍼런스 보드에 따르면 한국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은 2017년 1.2%에서 2018년 0.5%로 하락했다. 총요소생산성은 노동과 자본의 투입량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가가치의 증가분을 의미한다. 생산과정에서의 혁신과 관련 깊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4차 산업 혁명이 급속도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어 잠재성장률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작년 실질성장, 잠재력보다 0.7%P 낮아

더 큰 문제는 실질 성장률이 계속 낮아지는 잠재 성장률에도 못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다. OECD 추산 잠재성장률 대비 0.7%포인트나 낮다. 올해 정부의 성장률 목표(2.4%)를 달성한다고 해도 잠재성장률을 밑돈다. 잠재성장률이 낮아지면서 정부의 확장 재정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같은 통화 정책의 약발이 먹히지 않고 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부가 지난해 나랏돈을 쏟아부었지만, 부가가치 창출은 극히 미미하다”며 “민간 투자 활성화를 위한 투자 여건 개선에 적극 나서야 미래 성장 동력을 창출하고 잠재성장률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OECD 주요국 2019년 성장률

OECD 주요국 2019년 성장률

하지만 정부는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2%를 기록한 데 대해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자평했다. 수출 환경이 나빠진 상황에서 나랏돈(재정)을 풀어 성장률을 떠받친 것은 ‘발 빠른 대응’이라고도 강조한다. 재정은 문재인 정부의 성장 전략인 ‘소득주도 성장(소주성)’의 핵심 동력이다. 소주성은 재정 사업 등으로 일자리와 소득을 늘려 시장 내 수요를 살리고, 이후 기업의 투자·생산 확대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추구한다.

하지만 주요 경제지표를 보면 나랏돈을 풀어도 효과는 미미했다. 생산량 증가 폭이 둔화한 가운데 공장에서 만든 제품이 잘 팔리지 않아 창고에 쌓이는 재고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나서다. 그러면서 기업의 투자 여력도 줄었다. 소주성 전략이 잘 먹히지 않았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지난해(11월 기준) 전(全) 산업 생산지수는 109.7을 기록했다. 이 지표는 국내 모든 산업의 생산활동 동향을 지수화한 것이다. 기준연도 2015년보다 제품과 서비스 생산이 더 많으면 100 이상, 적으면 100 이하로 나타난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이 지표는 꾸준히 올랐다. 2015년부터 2017년(108.2)까지 2년 간 6.6포인트 상승했다. 그러나 정부 출범 이후인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는 1.5포인트 오르는 데 그쳤다. 생산 활동이 그만큼 둔화했다는 의미다.

산업별 생산지수를 보면 경기 전반에 영향이 큰 제조업·건설업의 생산지수는 최근 2년 새 모두 하락했다. 하락 폭은 제조업 0.2포인트, 건설업 19.2포인트로 부동산 규제에 따른 건설 생산 하락 폭이 두드러졌다. 산업 생산지수가 오른 분야는 재정 사업 영향이 큰 보건·사회복지서비스업, 공공행정 관련 산업이었다. 한국의 ‘성장 엔진’이라 일컫는 제조업 등의 생산은 둔화하고 재정이 주도한 저수익 사업 분야에서만 생산이 활발해진 것이다.

광공업 재고지수 문정부 들어 급상승

지난 22일 오후 서울 명동거리. 북적였던 관광객들과 젊은층이 눈에 띄게 줄었고, 건물 곳곳에 임대를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뉴스1]

지난 22일 오후 서울 명동거리. 북적였던 관광객들과 젊은층이 눈에 띄게 줄었고, 건물 곳곳에 임대를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뉴스1]

문제는 재고지수다.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이 얼마나 창고에 쌓이는지를 살펴보는 광공업 재고지수는 최근 2년 새 11.6포인트 상승했다. 현 정부 출범 전인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오른 폭(3.7포인트)의 3배가 넘는다. 상품이 창고에 쌓이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의미다. 반면 상품이 시장에서 팔리는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광공업 출하지수는 꾸준히 오르다 최근 2년간 4.2포인트나 하락했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설비투자 증가율이 8.1% 감소한 것은 최근 재고·출하 흐름의 결과라고 분석한다.

김동원 전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는 “지난해 국내총생산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생산물이 팔리지 않고 창고에만 쌓이는 양상이 눈에 띈다”며 “경제 위기 이전엔 늘 재고 증가가 선행했기 때문에, 정부는 이 같은 지표를 허투루 넘겨선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출은 물론 내수용 제조업 시장도 크게 위축했다. 소주성은 ‘국내 수요 증가→내수 제조업 생산·판매 활성화’의 선순환도 추구했지만, 이런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최근 2년간 광공업 출하지수는 수출 부문에서 1.5포인트 떨어졌지만, 내수 부문에선 수출보다 더 크게(-6.3포인트) 떨어졌다. 정부는 최근 경기 부진 원인을 미·중 무역전쟁과 브렉시트(Brexit) 등 대외 변수 위주로 찾고 있지만, 내수 시장 역시 기업 투자 위축으로 한국산 기계·장비 등 제품을 구매할 여력이 크게 떨어진 것이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 제조업체들이 설비투자에 쓸 돈이 떨어진 것이 내수 출하지수가 크게 하락한 이유”라며 “지금은 기존 설비의 유지·보수조차 힘들어진 기업이 많아졌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종=하남현·김도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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