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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경험 아낌없이 나눠주고 싶다, 그런데 어디서?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51)

20세기 초에는 인간의 수명이 40대에 불과했는데 의학의 발달로 이젠 80대로 늘어났다. 1세기 만에 꼭 2배가 된 셈이다. 19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은 60을 넘지 못했다. 그때는 특별히 은퇴준비가 필요하지 않았다. 퇴직 후 몇 년이 지나면 수명이 다하기 때문이다. 양질의 영양공급으로 수명은 지속해서 늘어났다. 서구 선진국은 물론 동남아시아 국가의 수명도 80에 달한다.

영국의 사회학자 피터 라슬렛은 인생을 4기로 구분하고 1기는 태어나서 배우는 시기, 2기는 가정을 꾸미고 사회에서 활동하는 시기, 3기는 은퇴 후 재교육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시기, 4기는 임종을 준비하는 시기로 정의했다. [사진 U3A 홈페이지]

영국의 사회학자 피터 라슬렛은 인생을 4기로 구분하고 1기는 태어나서 배우는 시기, 2기는 가정을 꾸미고 사회에서 활동하는 시기, 3기는 은퇴 후 재교육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시기, 4기는 임종을 준비하는 시기로 정의했다. [사진 U3A 홈페이지]

수명의 증가로 은퇴 후에 많은 시간이 주어지자 인생재설계에 대한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영국의 사회학자 피터 라슬렛은 인생을 4기로 구분하고 1기는 태어나서 배우는 시기, 2기는 가정을 꾸미고 사회에서 활동하는 시기, 3기는 은퇴 후 재교육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시기, 4기는 임종을 준비하는 시기로 정의했다. 그는 인생 3기를 맞이하는 사람을 위해 1982년 3월 케임브리지 세인트존대학에 U3A (University of the 3rd Age)란 교육프로그램을 개설했다.

원래 U3A는 프랑스에서 태동된 조직이다. 프랑스 역시 인생 3기를 살고 있는 시니어의 재교육을 위해 1968년 법률을 제정하고 1973년 툴루즈(Toulouse)대학에 은퇴자를 위한 U3A강좌를 열었다. 프랑스의 U3A는 지자체나 대학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고 있다. 이후 U3A는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등으로 전파된다.

영국의 피터 라슬렛은 U3A 제도를 받아들이되 프랑스 모델에 반대하고 시민 스스로가 주도하는 원칙을 세웠다. 학교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회비만 내고 시민이 자주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회비는 교육에 필요한 공간 사용료 및 소모품 구입 등에 쓰이고 강사에게 강의료도 지급하지 않는다. 후원금도 학교의 존폐가 달린 경우를 제외하곤 받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시스템이 가능할까.

‘노인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격언이 있다. 인생을 살며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지식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이러한 지식을 주변에 나누어주고 싶어 한다. U3A는 이런 욕구를 교육에 도입했다. 영국 런던에 있는 U3A의 경우 상근하는 교직원이 자원봉사자다. 강의하는 교수도 모두 자원봉사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던 U3A에는 강좌가 180개에 이른다.

‘나의 지식이 어떤 사람에게 필요하고 또 다른 사람의 지식은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이 U3A의 교육원리다. 즉 내가 아는 것을 가르치고 내가 모르는 것은 배운다. 은퇴하면 자칫 노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남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노인 스스로가 자립적으로 운영한다는 취지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학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013년 3월 분당에 조그만 공간을 빌어 취지에 공감하는 이웃들과 학교를 오픈했다. 영국이 U3A를 개교한 지 30년 만에 우리나라에도 유사한 학교가 생긴 것이다. 첫 강의에는 7명이 참석했다. 강사는 회계 법인에 근무하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지인 한 사람이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 강사를 초빙하는 게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유명인의 강의보다 평범한 사람의 진솔한 이야기가 감동을 준다.

내가 아는 것을 가르치고 내가 모르는 것은 배운다는 것이 U3A의 교육원리다. 은퇴하면 자칫 노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남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노인 스스로가 자립적으로 운영한다는 취지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진 Pixabay]

내가 아는 것을 가르치고 내가 모르는 것은 배운다는 것이 U3A의 교육원리다. 은퇴하면 자칫 노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남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노인 스스로가 자립적으로 운영한다는 취지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진 Pixabay]

실제 강의에 참석했던 시민 한 사람이 모친의 사례를 들려주었다. 할머니는 과일을 살 때 좋은 것을 고르기보다 볼품없고 흠이 있는 것을 골랐다. 과일 장수가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 반값만 내고 가세요”라고 말했지만 할머니는 제값을 다 치렀다. 장사를 잘하라며 격려까지 보내주었다. 나는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생을 돌아보면 늘 크고 보기 좋은 것만 골랐지 할머니처럼 남을 배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교 소식이 매체를 통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해외에서도 연락이 왔다. 방콕에 있는 교포가 전화를 걸어 그곳에 우리 교포가 400여명 있다며 인생학교를 개설하겠다고 한다. 북경과 시카고에서는 직접 교민이 방문했다. 워싱턴 DC와 영국 런던에서도 서신이 왔다. 국내에서도 교회, 지자체 등 여러 기관이 방문했다. 피터 라슬렛이 강조했듯 은퇴한 사람들이 배움에 대한 욕구가 매우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지난달에는 국립중앙도서관 스텝이 방문했다. 도서관에 공간을 마련할 테니 시민들이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는 강좌를 개설한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의외로 시니어 회원이 많다. 그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한다. 열정도 많고 의욕도 크다. 누군가 자리만 깔아준다면 모두 한몫을 할 사람이다. 현재 도서관 스텝과 협의하고 있는데 3월 초에 개강할 예정이다.

영국에는 현재 1000개가 넘는 U3A가 있다. 독일에도 유사한 시민대학이 900여개에 달한다. 국립중앙도서관처럼 정부나 지자체, 공공기관에서 공간을 제공해주면 우리나라도 지역 곳곳에 시니어 학교가 생길 수 있다. 시민 스스로에게 자긍심도 심어주고 국가 예산도 줄일 수 있다. 아버지의 공부하는 모습이 자녀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아름다운 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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