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제 1부 독립을 위하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35년3월24일 나는 중앙고진 3학년을 수료했다. 봄방학이 1주일밖에 안돼 고향집에 돌아가지 않고 그냥 서울에 머물러 있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칩에서 10원을 부쳐오며『일이 있으니 곧 내려 오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26일 집에 내려가니 뜻밖에 3일 후인 29일을 장가 들 날로 정했으니 결혼하라고 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 당장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전에 한마디 의논도 없고 전혀 이름도, 얼굴도 보지 못한 처녀에게 어떻게 강가를 가라는 것인가. 나는 완강하게 싫다고 거절하며 서울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곧 서울로 달아나려고 짐을 챙기다 생각하니, 결혼식 날짜가 이틀밖에 남지 않았는데 신랑이 싫다고 달아났다면 그 처녀는 어찌될까? 그 처녀의 일생에 대한 너무나 큰 타격이 되지 않을까? 더욱이 그 처녀가 나를 평소 사랑해주며 여운형에게 소개해준 정재화의 무남독녀 외딸이라는 데에 너무나 박절하게 할 수도 없는 딱한 사정이었다.
나는 원래 결혼하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혼자 중국으로 떠난 형, 돌아올 수 없는 형을 홀로 기다리고 있는 형수, 얼마나 안타까우며 불행한 인생인가? 나도 독립운동을 하자면 평온한 가정생활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한 여인을 불행하게 만들 수가 있겠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괴롭고 불행한 결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할 수 없이 나는 눈을 감고 3월29일 정재화의 외동딸과 결혼했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위로 일신여고를 졸업했다. 나는 그녀의 집에서 이틀 밤을 자면서 손도 잡아보지 않고 그냥 돌아와 곧 서울로 올라왔다.
그해 창경원 벚꽃은 4월12일께부터 피기 시작했다. 중앙고보와 배재고보의 친구들 7, 8명이 창경원에 놀러갔다. 경성제대 예과학생 7, 8명이 술을 마시고 일본노래를 부르며 떠들고 있었다.『왜놈 종노릇하려고 뽐내고 다니는 놈들, 평소에 보기 싫은 놈들, 당장 패 죽여버리겠다.』우리중의 한 친구가 그들에게 달려가 한 놈을 발로 차버리자 꼼짝 못하고 벌렁 넘어져 버렸다. 그래 우리 친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그들은 술병이고 게다짝이고 다 팽개치고 달아나 버렸다.
그 이튿날이었다. 상해의 동화 족구단이란 축구팀이 서울에 와 동대문 운동장에서 경성축구단과 경기를 가졌다. 축구경기를 구경하고 저녁때 가회동 하숙집으로 돌아가는데 제동 네거리에서 그 전날 창경원에 같이 갔던 그 친구들과 만났다. 내 하숙방이 두칸 방으로 제일 컸기 때문에 다같이 내 하숙방으로 갔다.
호떡과 땅콩을 사다 실컷 먹고 어두워서야 나갔다. 나는 땅콩껍질을 치우고 맨 나중에 나가니 한길에서 벌써 일본순사와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로 길을 비키지 않고 맞부딪쳐 육박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순사를 때린 학생이 제동 파출소에 끌려갔기 때문에 우리도 따라서 파출소로 갔다. 그러자 전부 포승줄로 묶어 종로경찰서로 잡아가더니 개 패듯이 죽도록 두들겨 팼다. 일본제국의 경관을 폭행했다는 이유로 무조건 반죽음을 시켜놓고 취조를 시작했다. 성명·본적을 묻는데 나를 취조하는 형사가 우연히 전에 우리형의 취조에 관계한 형사였다. 그는 내가 박기동의 동생인 것을 알자 형제가 다 불량(불량)학생이라며 가혹한 고문을 시작했다.
정말 나는 몇 번 죽었다 깨어나곤 했다. 허리가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져 걷지도 못하고 질질 끌려 유치장에 갇혔다. 입과 목에서 피 덩어리가 넘어와 숨을 쉴 수가 없고 전신이 저절로 벌벌 떨렸다. 겨우 눈을 떠보니 먼동이 터 오는 새벽이었다. 야! 나는 이제 병신이 되고 마는구나….너무나 분해 이를 악물고 혀를 깨물어 죽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 생각을 하니 눈물이 저절로 솟아올랐다.
아픔을 참을 수 없어 몇 번이고 몸부림치며 이를 악물었다. 형도 이런 고문을 몇 번이나 당하고 너무나 견딜 수 없어 부모님과 사랑하는 처자를 버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조선 청년을 다 죽여버리니 조선독립은 절망이 아닌가? 아니다.
우리의 동생·조카·아들딸들이 이 민족에게 이런 고문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죽어도 독립은 해야지.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해야지. 나는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입안이 터져 아침밥도, 점심밥도 먹을 수가 없었다. 오후4시쯤 되어 순사가 내 이름을 부르 며 나오라고 했다. 그러나 일어날수가 없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부축해 겨우 일어났다.
나가보니 김병노 선생이 보증을 서고 나의 신병을 인수하러 와 있었다. 김병노 선생의 어깨를 붙들고 겨우 발을 옮겨 제동네거리 설렁탕 집에 가서 그만 드러눕고 말았다. 며칠 뒤중앙고보 현상윤 교장을 찾아갔다. 현 교장은 내 얼굴을 보고는 안타까운 어조로『경찰에서 전부 퇴학시키라는 통보가 왔다. 다른 학생은 퇴학시켜도 너는 무기정학 시켰으니 한 열흘쉬었다가 다시 오너라』고 특별조치를 해주었다.
『교장 선생님의 마음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도 같이 퇴학하겠습니다』하고 나는 중앙고보를 퇴학하고 말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