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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길이 남을 명국두는게 소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4세 때부터 바둑돌을 잡기 시작해서 어언 서른 두 해가 지나갔다. 『바둑이 무엇이냐?』고 물어올 때마다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 뢰월 선생께서는 「현원」 두 글자로 요약하셨지만, 맞는 말씀이나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 것도 같다. 그야말로 멀고 아득하기만 해서 알 수가 없다.
다만 한가지, 바둑은 자기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말만은 할 수 있겠다. 무릇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인가를 이루고자하는 경우에 다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길밖에는 없다. 불가에서는 그것을 「평상심」이라고 한다는데, 그런 경지를 지향할 뿐이다. 「무심」이라는 말을 제일 좋아한다.
바둑은 나의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나 바둑을 생각하고 연구한다. 새벽 일찍 일어나 옛사람들의 기보를 보고 바둑돌을 놓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대국이 있는 날에는 십구노반상에서 승부를 겨루고 대국이 없는 날에는 한국기원기사실에 나가 다른 사람들의 바둑을 눈여겨본다.
다른 사람들의 기보를 보다가 새롭게 시도된 수를 보면 머리 속에 그림을 그려보고 잘된 수일까 어떤가를 생각해본다. 잘못된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혀를 쯧쯧 차기도 한다.
바둑은 나의 삶이고 나의 꿈이다.
비록 응창기배 세계프로 바둑선수권전에서 우승하여 세계정상에 올랐다하더라도 나의 바둑은 아직도 까마득하게 미완이다.
바둑의 깊고 오묘한 세계, 내가 언제나 두려움 없이는 붓을 들어 써볼 수 없는 「현현」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더욱 정진해야한다.
그리하여 기도의 높은 경지에 이르고 바둑사에 오래 남을 명국을 남겨야한다.
바둑사에 오래 이름이 남을 기사가 되겠다는 나의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무수한 전문기사들이 그 같은 꿈을 지녔다. 그러나 바둑사는 몇몇의 기성이나 달인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응창기배 세계프로 바둑선수권대회 마지막 제5국의 기보를 5백만 바둑팬에게 소개하면서 나의 부끄러운 글을 끝내려한다.
싱가포르에서 있었던 섭위평과의 4국 때는 승부를 떠나서 부끄럽지 않은 기보를 남기겠다는 생각이었다. 4국 전날 기자회견을 하는데 섭위평이 『중국인이 주최한 대회고 나도 공헌했으니 내가 이겨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다.
나는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4국은 섭9단이 나한테 진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진 바둑이였다. 팽팽한 접전이었는데 섭9단이 꼭 이겨서 5번 승부를 3대1로 끝내 버리려고 서두르다가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제5국 때는 나보다 섭9단의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을 보고 안심이 되면서 차분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섭9단은 중국인이 주최한 대회에서 우승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던 것 같다.
흑을 잡고 두게 되어 기분이 나빴으나 단판승부라서 크게 불리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담담하게 자신감을 갖고 임했다.
보통 때는 큰 시합을 앞두면 잠이 잘 안왔는데 5국 전날은 이상하게도 숙면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1 ,2, 3국을 둘 때보다는 여러 가지로 편안했기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제5국은 초반에는 나빴으나 좌변에 뛰어들어 성공하여 한판의 바둑이 되었다.
섭9단이 돌을 던지게된 대목에서 둔 수가 실수였는지 착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안되는 수를 두었고 나는 정확하게 응수하여 굴복시켰다.
미세하지만 지고있다고 생각하여 던져본 수일까.
여러 가지 대응책이 있었지만 내가 둔 흑145의 수 외에 다른 길을 택했다면 결과는 내가 질 수밖에 없는 진행이 될 것이었다.
우승이 확정된 후 싱가포르교민들의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 뭉클하는 것을 느꼈다. 한국인으로서, 기사로서 해내야 할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나의 성장을 지켜보고 성원해주신 바둑팬들에게 거듭 감사드린다. 앞으로 보다 나은 바둑을 두어 보답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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