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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금융 위기가 다시 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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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논설실장

고현곤 논설실장

금융권에 있는 친구가 새해 벽두부터 섬찟한 얘기를 했다. “국내에 사모펀드가 몇 개인 줄 알아? 무려 1만1000개를 넘는데, 어떻게 운영하는지 아무도 몰라. 사모펀드 환매 중단으로 1조5000억원이 묶인 라임자산운용 사태는 빙산의 일각이야. 신용등급 낮은 고위험 채권에 무리하게 투자한 경우가 많았지. 감독도 제대로 안 했고. 사모펀드발 금융위기가 올 수도 있어.”

환매중단 라임 사태, 빙산의 일각 #97년 외환위기 튼튼한 재정 덕에 #2008년 금융위기 우방 도움 극복 #지금 믿을 구석 없고 국론도 분열

그 친구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지만, ‘금융위기가 다시 오면 막아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모펀드가 아니더라도 경기 침체와 정책 실패로 위기의 방아쇠를 당길 만한 악재가 수두룩하다. 부동산 버블과 가계부채는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시한폭탄이다. 북한 도발 같은 컨트리 리스크도 다시 커지고 있다. 중국발 위기도 심심찮게 거론된다. 중국의 기업 부채는 10년 새 다섯배나 늘었다. 새해 들어 중동 정세도 심상치 않다.

우리는 1997년 11월 외환위기와 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었다. 전쟁 같았다. 그나마 중남미·남유럽의 몇몇 좌파 포퓰리즘 국가처럼 파국을 맞지는 않았다. 우리에겐 위기 때마다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97년 얘기만 나오면 ‘내가 외환위기 극복의 1등 공신’이라고 무용담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비장의 카드는 튼튼한 재정이었다.

점령군처럼 들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관계자들은 재정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부도난 국가치고는 재정이 너무나 튼튼했기 때문이다. 97년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11.4%였다. 2018년 40.1%까지 높아졌으니 당시 재정이 얼마나 튼실했는지 알 수 있다. 기업이 줄도산하는 급박한 상황에도 강경식 경제부총리 같은 경제관료들이 욕먹을 각오로 고집스럽게 재정을 지켰다. 경제관료는 그런 일 하라고 세금으로 월급 주면서 거기에 앉혀놓은 것이다. 덕분에 98년 이후 재정을 적극 풀어 경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외환위기를 겪은 터라 평소 대비를 한다고 했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처음에 정부는 외환보유액이 2500억 달러를 넘어 문제없다고 큰소리쳤다. 두 달 만에 400억 달러가 빠져나가자 공포가 엄습했다. 원·달러 환율은 1100원대에서 1500원대로 치솟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에서 비롯된 미국발 위기였지만, 우리가 더 휘청거렸다. 국제금융 시장이 흔들리자 한국 같은 신흥국에서 먼저 돈이 빠져 나갔다. 서글프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2008년 비장의 카드는 외환보유액이 아니라 우방과 맺은 통화스와프였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미국·일본과 원화를 주고, 달러·엔화를 가져오는 계약을 했다. 비로소 금융시장이 안정을 찾았다. 2000억 달러 넘게 쌓아놓은 외환보유액보다 300억 달러 한미 통화스와프 계약서가 더 도움이 됐다. 이명박 정부와 부시 정부가 긴밀한 관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방이란 외교적, 군사적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한 순간이기도 했다.

지금은 97년, 2008년과는 다르다. 97년처럼 재정이 튼튼하지 않다. 2008년 같은 든든한 우방도 없다. 그동안 재정을 너도나도 곶감 빼먹듯 축냈다. 대통령부터 군수·구청장까지 국민 세금으로 자기 돈 쓰는 것처럼 생색을 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경제 관료들은 자리 보전을 위해 코드 맞추기에 급급했다. 재정을 지키겠다는 예전의 사명감은 온데간데없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재정이 충분히 감내 가능한 수준”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나중에 그는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통화스와프는 미국과 2010년, 일본과는 2015년에 끝났다. 이제는 급할 때 돈을 빌려줄 우방이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한미 동맹이 예전 같지 않다. 위기가 오면 미국은 공짜로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계산이 빠른 트럼프 정부는 우리 약점을 파고들며 많은 것을 가져가려 할 게 틀림없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로 멀어진 일본에 손을 벌리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일본이 차제에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덤벼들지도 모른다. 아베 정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처럼 애국심에 호소하는 이벤트도 여의치 않다. 97년은 영·호남 갈등이 있었지만, 큰 틀에서 보면 군사정권을 몰아낸 민주 정부의 국민이라는 동질감과 자부심이 있었다. 지금은 지역, 이념, 빈부, 젠더, 세대, 서울·지방, 노사, 정규직·비정규직 등 사방팔방으로 찢겨 있다. 사회 곳곳에 ‘잘해봐라’ 하는 냉소가 퍼져있다. 청년 75%가 ‘한국을 떠나고 싶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 지난해 조사)고 한다.

그렇다고 ‘저 사람에게 맡기면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도, 경제관료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리 둘러봐도 위기가 왔을 때 내놓을 비장의 카드가 없다. 외교적으로 고립무원에, 재정이 부실하고, 국론도 분열된 나라만 있을 뿐이다. 새해 벽두부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저 위기가 오지 않기만 기도해야 하는 딱한 신세가 됐다.

고현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