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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탓 허위 자백"…文이 변호했던 낙동강변 '살인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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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이 변호했던 30년 전 살인 사건

“두 손엔 수갑이 채워졌고, 거꾸로 매달린 채 얼굴에는 수건을 씌우고 물을 부어댔다. 살기 위해서 경찰들이 시키는 대로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고법 6일 재심 여부 결정 #“고추냉이 섞은 물 얼굴에 붓고 폭행” #21년 수감 후 풀려난 피의자들 분통 #목격자 진술만 믿고 범인으로 몰아 #문 대통령, 항소심·상고 변호 맡아 #“35년 변호사 하며 한이 남는 사건”

“고문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고 검찰에 가서 말했는데도 검사는 두꺼운 법전으로, 검찰 수사관은 신고 있던 슬리퍼로 뺨을 때리더라.”

장동익(61), 최인철(58)씨는 30년 전인 1990년 1월 4일 부산 사상구 엄궁동 낙동강변 갈대밭에서 발생한 일명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1년여를 감옥에서 지냈다. 당시 경찰은 이 두 사람이 낙동강변에서 차량 데이트를 즐기던 한 커플을 납치해 여성은 강간·살해한 후 시신을 유기하고, 남성에게는 상해를 입힌 것으로 결론 내렸다.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범인을 붙잡지 못해 미제사건으로 처리했다. 1년 10개월 후인 1991년 11월 두 사람은 다른 사건에 휘말려 부산 사하경찰서에서 조사받다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됐다. 조사 과정에서 범행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사건이 검찰로 송치된 후 경찰 수사 과정에서 물고문과 폭행을 당해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이들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과거사위, 진술조서 왜곡 정황 포착

두 사람은 중앙SUNDAY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래도 검찰은 다를 줄 알았는데 거짓말을 한다며 오히려 수차례 폭행을 당했다”며 “우리를 범인으로 몰아간 경찰도 밉지만, 검사와 수사관에 대한 원망도 크다”고 말했다. 특히 최씨는 “검찰이 더 악랄했다는 생각도 든다”며 “고문만 안 했다뿐이지 경찰 수사 내용을 그대로 시인하라고 윽박지르고 때려 정신적 고통이 심했다”고 했다. 재판 과정에서도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줄곧 주장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들은 결국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은 감옥에서 모범수로 생활하다 2003년 특별 감형을 받고 복역한 지 21년여가 지난 2013년에 출소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2016년 5월 두 사람은 재심 전문인 박준영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해 11월까지 7차례에 걸친 법원 심리 끝에 오는 6일 부산고등법원에서 재심 여부가 결정된다. 낙동강변 살인사건이 세간의 이목을 끈 이유 중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항소심과 대법원 상고를 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대선 전인 2016년, 이 사건을 다룬 SBS 프로그램에 출연한 문 대통령은 “35년 동안 변호사를 하면서 한이 남는 사건”이라고 했다.

현 정부 출범 직후 법무부 검찰 과거사 위원회 산하 대검 진상조사단이 이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진실 찾기가 시작됐다. 과거사위는 최씨와 장씨를 비롯해 사건 관련자들을 두루 조사한 결과, 이들이 경찰 수사과정에서 실제로 고문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경찰이 최씨와 장씨에게 알리바이가 될 수 있는 참고인들의 진술조서를 왜곡하고 은폐한 정황도 발견됐다고 밝혔다. 과거사위는 “당시 검찰은 이들의 자백 진술과 객관적 사실 사이에 모순점들이 여럿 존재하지만,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기소를 했다”고 지적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1992년에야 DNA 분석이라는 과학적 수사 기법이 국내에 도입되는 등 30년 전에는 증거를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했고, 피의자의 자백이 유죄 여부를 가르는 중요한 잣대가 된 측면이 있었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이어 “화성 8차 사건과 마찬가지로 낙동강변 사건에서도 현장에서 두 사람의 지문 등 객관적 증거는 전혀 나오지 않았고 목격자(피해 남성 A씨)의 부정확한 진술 정도만 있었다”고 덧붙였다.

경찰이 두 사람을 범인으로 특정한 데는 특히 살해된 여성과 함께 있다가 도망친 피해 남성 A씨의 진술이 결정적이었다. A씨는 사건 발생 직후 경찰 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봤다는 범인들의 인상착의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몽타주조차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사건 1년 10개월 후 장씨와 최씨가 붙잡혀 오자 그제야 A씨는 “범인 중 한 사람은 덩치가 컸고 다른 사람은 키가 작았다”는 등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A씨의 진술은 초동수사 때와 이후를 비교하면 일관성 없이 오락가락했지만 경찰은 피해자이자 목격자라는 그의 말만 믿었다. 특히 A씨는 범인들과 격투를 벌인 정황을 상세히 진술했다.

“키 작은 범인(장동익)이 제 머리카락을 잡고 갈대밭으로 끌고 내려갔다. 물가로 가서 범인이 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잡고 ‘너는 죽어야 한다’며 나를 물에 처박았다. 범인이 따라 들어와 같이 10분간 서로 주먹으로 치고받았다. 범인은 내 머리카락을 잡고 차 있는 곳까지 끌고 갔다.”

박준영 변호사는 “A씨가 격투를 벌였다는 장씨는 시신경위축증이 있는 1급 시각장애인”이라며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를 그만둘 정도였고, 군 징병검사에서도 면제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평소 길거리에서 전봇대에 잘 부딪히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등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을 겪었다는 장씨가 가로등도 없어 캄캄한 갈대밭 물속에서 A씨와 격투를 벌이고, 도망가는 그를 붙잡아 끌고 나오는 것이 과연 가능했겠느냐는 것이다.

당시 경찰 4명 “기억 안 나” “고문 안 해”

박 변호사는 “국과수는 사망한 여성의 손톱 밑에서 A씨의 혈액형과 동일한 혈액형을 검출했다”며 “A씨의 믿기 어려운 진술 등까지 감안하면 경찰이 그를 용의선상에 놓고 수사했어야 했는데 경찰은 사건 초기부터 A씨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A씨는 사건 발생 수년 후 지병을 앓다가 사망했다. 한편 그동안 법원에서는 과거 장씨와 최씨를 고문한 것으로 지목된 경찰들을 불러 진술을 들었다. 재판정에 선 경찰 4명(3명은 퇴직)은 하나같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거나 “고문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지금도 고문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했다.

“잠을 못 자게 하려고 뒷목 부분에 차가운 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렸다. 지금도 그때 기억과 소름 끼치는 느낌 때문에 보슬비만 와도 우의를 입고 다닌다. 고추냉이를 섞은 물을 주전자에 넣어 얼굴에 들이붓는 고문의 기억 때문에 좋아하는 회를 먹을 때도 고추냉이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박 변호사는 “장씨와 최씨의 무죄를 확신한다”고 했다. 그는 또 “화성 8차 사건과 낙동강변 사건은 경찰의 가혹 행위와 주먹구구식 수사를 통한 자백 강요가 유죄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상당히 닮은꼴”이라며 “다음 주 있을 재판에서 재심 신청이 받아들여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범인으로 몰리는 사회적 약자들, 재심 요건·절차 간소화해야

‘나라슈퍼 사건’에 연루됐던 3명은 2016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뉴시스]

‘나라슈퍼 사건’에 연루됐던 3명은 2016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뉴시스]

협박과 가혹 행위 등 강압 수사 끝에 허위 자백을 해 범인으로 몰리는 이들 중에는 장애인, 빈곤층, 가출 청소년 등 사회적 약자가 적지 않다. 화성 8차 사건에서 범인으로 몰려 20년을 복역한 윤모(52)씨는 3세 때 소아마비를 앓은 지체장애인이다. 나라슈퍼 사건의 ‘범인’ 중 1명은 정신지체 장애가 있었고, 2명은 사건 당시 10대 청소년이었다.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에서 경찰의 강압 수사에 범행을 자백했다가 무죄로 풀려난 2명은 장애가 있는 노숙자였다. 수사기관은 이들의 신체나 정신적 특징, 어려운 여건 등을 충분히 고려하고 반영해 조사하기보다 오히려 이를 약점으로 삼아 자백을 강요하는 식의 강압적 수사 관행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들은 출소 후에도 엄격한 재심 요건과 절차 때문에 억울함을 풀기가 쉽지 않다. 형사소송법 420조에는 ‘유죄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해 무죄 또는 면소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 재심 개시를 인정한다’고 돼 있다.

지난해 10월 한국형사정책연구원과 한국무죄네트워크 주최로 열린 ‘재심제도 개혁 대토론회’에서 이진국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프랑스는 명백성 또는 신규성 중 어느 하나만 충족하면 재심청구가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에서도 재심요건·절차를 간소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2월 4일 ‘형사소송법 일부 개정 법률안’에 대한 토론회에서 “재심 요건이 지나치게 엄격해 피해자 구제가 어렵다”고 말했다. 법원이 청구일로부터 1년 이내에 재심 여부 결정을 하도록 하고, 재심개시 결정에 대한 즉시항고·재항고에 대해 6개월 이내에 결정하도록 기간을 제한하자는 내용이 담긴 개정안을 준비 중이다. 이에 대해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는 “피해자의 부족한 부분을 심리 과정에서 법원이 보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면서 “결정 기한을 6개월 이내라는 식으로 제한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또 “재심사유가 곧 상고이유가 되는데, 현행 상고심 제도가 보완되지 않으면 법관의 업무 부담만 가중되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관련 법을 개정할 때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고성표 기자 muze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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