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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은퇴 후 개도국에서 일해 보라”

중앙일보

입력

경력 10년이면 코이카 자문관 응모 가능... 몽골 환경관광부 소속으로 인생 2막

이필재의 ‘브라보! 세컨드 라이프’(27) #김규원 몽골 환경관광부 코이카 자문관

사진:이원근 객원기자

사진:이원근 객원기자

“한국국제협력단(KOICA·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자문관처럼 시니어 대접을 해 주는 일자리가 많지 않을 겁니다. 해당 분야에서 10년 이상 경력을 쌓으면 누구나 이 자문관에 응모할 수 있죠.” 지난 12월 17일 몽골로 출국한 김규원 몽골 환경관광부 코이카 자문관은 출국 전 인터뷰에서 “개도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맞는 인생 2막은 시니어로서 퍽 매력적인 기회”라고 말했다. “인생이 유한하다는 걸 새삼 느꼈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1년 이상 재임할 수 있고 다른 나라로 옮겨 더 연장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생애 최초로 테러, 지진 같은 위기 상황을 겪을 수도 있어요.”

새삼 느낀 인생의 유한함

코이카 자문관이 되려면 서류전형, 신체검사, 면접의 세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3시간가량 걸리는 면접 때 영어 작문과 영어 구술을 해야 한다. 그는 코이카 자문관 파견, 평창올림픽 자원봉사를 염두에 두고 10여 년 전 전화 영어 개인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미국인·캐나다인과의 전화 통화는 비싸지만 동남아 영어권 국가 영어교사와의 통화는 상대적으로 비용이 저렴하다. “동남아 영어교사들은 더 친절하고 한류에 관심이 많아 대화의 소재도 더 풍부하죠. 전화 교습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할 수 있지만 반강제적이고, 얼굴을 보고 하는 게 아니라 영어를 잘 못해도 창피하지 않아요. 코이카 자문관에 관심이 있다면 지금 영어 공부를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오랜 만에 하는 영어공부는 재미도 있어요.”

한때 영화감독을 꿈꿨던 그는 또 영어 공부를 목적으로 미국과 영국의 드라마를 주기적으로 시청했다. 밤샘 시청도 했다. TV와 컴퓨터 옆에 노트를 펼쳐 놓고 수시로 메모도 했다. “중학교 땐 영어를 곧잘 했는데 사춘기를 된통 겪은 고교 시절엔 비호감 과목이었습니다. 그런데 2막에 행복해지려면 영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신문방송학 박사이다. 지난해까지는 충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근무했다. 지난해엔 30여 년 만에 안식년을 보내면서 평창올림픽과 이어서 열린 평창 동계패럴림픽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다. 그 후 국립몽골대 법대 한국법센터에서 9개월 간 방문교수로 있었다.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를 가르쳤다. 이 몽골 명문대 학생들은 징기스칸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강했고 자신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몽골의 미래가 어둡다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대학은 몽골 법관의 절반가량을 배출했다. “저와 함께 술을 마신 학생들이 음주 후 도서관으로 향하더라고요. 이렇듯 몽골은 희망이 있는 나라입니다. 사람들이 순수하고,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기에 낯선 사람을 반기죠. 문화의 다양성 면에서는 우리보다도 뛰어납니다. 또 러시아의 영향으로 남녀가 평등한데, 남자는 생업으로 말과 양을 기르고, 그런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 하는 여자는 똑똑해 지려 대학에 가요. 지난해 가르친 학생의 90%가 여자입니다.”

그가 속한 몽골의 환경관광부는 부서 이름에 개발과 보존이라는 두 토끼를 잡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그는 관광정책과 소속으로 한국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몽골 국민에게 맞는 관광 정책의 개발과 집행에 대해 조언을 할 예정이다. 그는 두 나라 청소년들이 관광이라는 기회를 통해 서로 다른 문화를 체험하고 교류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려 한다. “제가 사는 충북 청주만 해도 외국인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여름엔 청주의 청소년이 몽골에 가 홈스테이하면서 영어와 테니스를 배우고 겨울엔 몽골 아이들이 청주를 찾아 공부하고 관광도 하는 프로그램이죠. 청주 청소년은 이로써 자신이 외국인 친구가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이후로 외국행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거예요.”

그는 충북연구원에 앞서 한국방송개발원(한국콘텐츠진흥원의 전신), 부산방송, 광주여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등에 근무했다. 사회생활의 절반을 지방에서 했다. 광주여대 전임강사 시절엔 교수협의회를 만들었고 불합리한 학교 운영에 항의해 이사장 퇴진을 요구했다 해직됐다. “삶은 누구에게나 지독한 현실이죠. 때로는 싫증이 나서 어떤 땐 봉급을 더 받을 욕심에 직장을 옮겼습니다. 그럴 때면 저 자신이 한심했고 한편 측은하기도 했어요. 몽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자아비판이라고 할까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됐죠.”

그는 한국 문화의 기저에 한국인의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강에 걸린 모든 다리가 ‘ㅇㅇ대교’이고 외국과 달리 대학교와 대학을 굳이 구분하는 것도 이런 열등감의 발로라고 설명했다. “한국인의 유난스런 서열화, 획일화 경향 자체를 저는 열등감 탓으로 봅니다. 그런데 인공지능(AI)이 대부분의 과업을 수행하는 디지털 노마드 시대엔 남들과 생각이 달라야 해요. 모난 돌이 정을 맞는 게 아니라 되레 둥글둥글한 돌보다 더 비싸게 팔리는 시대죠.”

그는 1남1녀를 뒀다. 취업해 독립한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술자리를 갖게 되면 그는 가끔 두 손으로 이들의 잔을 채워줬다. 그는 “나보다 멋진 삶을 살고 이 사회를 보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달라는 뜻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이 고교 때 수학여행을 가면 친구들과 나눠 마시라고 보드카 한병을 챙겨줬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자식에게 두 손으로 술을 따르면서 때로는 “부모 자식 간이 아니라 동료 사이 같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어른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남자들이 양성 평등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거나 노인들이 나이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것도 저는 열등감에서 나온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이라고 봐요. 몽골인들은 상대가 연장자라고 머리 숙여 인사하지도 않고 연장자도 이런 대접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건 나이를 떠나 친구예요.”

삶에서 가장 소중한 건 친구

몽골의 한국인 관광객은 연간 60만 명에 이르는 전체 관광객의 10%를 차지한다. 가장 비율이 높다. 그는 이들이 짧고 아주 소비적인 관광을 한다고 말했다. 반면 유럽인들은 한두 달 머물면서 정주민과는 다른 유목민의 삶을 관찰한다. 그는 한국인의 몽골 관광 패턴을 바꾸고 싶어 했다. “한국인 김 아무개가 다녀간 후 몽골 관광이 나아졌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청소부가 다녀가면 기분이 좋아지듯이 말이죠.”

그가 몽골 입국 후 머문 호텔에서 몽골 정부가 마련해 준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의 일이다. 한국에서 지인들이 챙겨준 전별금 봉투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첫날 마중 나왔던 지인에게 호텔에 전화를 걸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호텔 매니저였다. “청소부가 봉투를 맡겨 놓았느니 가지러 오라”고 그가 말했다. 몽골행을 앞두고 나에게 “소매치기가 가장 두렵다”고 했던 그는 그 청소부에게 약소한 사례금을 전해 달라고 매니저에게 부탁했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을 “즐겁게 살다 천천히 오세요”라고 새기고 싶다고 말했다. “좌우명은 ‘재밌게 살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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