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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게임 체인저는 신기술 아닌 ‘소비자 행동 훔치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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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4호 12면

‘파괴적 혁신’은 틀렸다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은 스타트업이 기존 강자에 도전해 무너뜨리는 과정을 뜻한다. 이때 신기술이 위너(승자)와 루저(패자)를 결정한다. 파괴적 혁신은 미국 하버드대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교수(경영학)가 2003년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이후 비즈니스 리더들 사이에서 최고 화두였다. 그런데 올 2월 크리스텐슨 이론을 정면으로 뒤집는 논리가 제시됐다. ‘디커플링(Decoupling)’이다.

테이셰이라 전 하버드대 교수 #페북·구글·아마존·넷플릭스 등 #소비자 행동에 빨리 대응해 성공 #스타트업 대부분 기존 기업과 비슷 #기술 개발로 승자 된 사례 드물어 #‘디커플링’ 잘해야 디지털시대 위너

#신기술이 아니라 고객의 가치사슬(비교·평가-구매-소비 과정)의 고리를 부수는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기존 강자를 위협한다는 얘기다. 주인공은 탈레스 테이셰이라 전 하버드대 교수다. 그의 책 『디커플링』은 올해를 대표하는 경영학책이다. 최근 그는 경영컨설팅회사 디커플링.co를 설립했다. 중앙SUNDAY는 국내 언론으론 처음으로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기술이 위너와 루저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고 했는데, 상식 밖의 말이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하버드 시절 동료였다. 애초 그의 이론을 뒤집으려고 내 연구를 시작하지 않았다. 어떻게 위너가 됐는지를 발견하기 위해 8년 동안 구글과 MS, 아마존뿐 아니라 수많은 정보기술(IT) 기업을 찾아가 조사하고 분석했다. 현장에서 조사해보니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사실이 나타났다.”
그게 무엇이었는가.
“재계의 판도를 바꾼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기술인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조사한 스타트업들 가운데 압도적인 다수는 기존 기업과 같거나 비슷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신기술을 개발한 스타트업이 기존 기업을 밀어내고 위너가 된 사례는 극소수였다.”
그러면 무엇이 게임 체인저였나.
"승자였다가 밀려나는 기업을 방문해 경영자에게 ‘무엇 때문에 당신 회사가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때 그 기업들의 경영자는 신기술을 갖춘 페이스북과 구글, 넷플릭스, 에어BNB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페이스북 등을 찾아가 ‘어떻게 기존 승자들을 밀어낼 수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뜻밖의 답이 되돌아왔다. ‘소비자들의 바뀌는 행동양식에 재빨리 대응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당신이 ‘소비자 구매활동 훔치기’라고 한 것을 말하는가.
"맞다. 성공한 스타트업들은 기존 기업에서 소비자를 빼앗아 오지 않았다. 소비자의 행동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예를 들면, 화장품 판매점인 세포라(Sephora)가 북미지역에서 승자였다. 손님은 세포라 매장을 방문해 컨설팅을 받고 로션 등 샘플을 사용해본 뒤 구매해 자신의 집에 가서 사용했다.”
어떻게 고객의 구매활동을 훔친다는 말인가.
"버치박스(Birchbox)나 입시(Ipsy)란 스타트업은 화장품 시장 고객의 구매행동 가운데 샘플 테스트 과정을 떼냈다. 고객이 온라인으로 샘플을 주문해 집에서 테스트해보도록 하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들이 시장을 장악해가는 바람에 세포라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테이셰이라는 버치박스나 입시 등이 한 고객의 구매행동 훔치기를 ‘디커플링’이라고 개념화했다. 디커플링을 잘하는 기업이 디지털 시대 위너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테이셰이라가 만든 또 다른 개념은 ‘소비자의 가치사슬(value chain)’이다. 고객의 탐색-구매-소비하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애초 가치사슬은 주로 생산자(기업)의 용어였다. 제품이나 서비스의 생산과정을 의미했다. 테이셰이라는 "시대가 바뀌어 소비자가 재계 판도를 결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계기가 있었을 텐데.
"IT혁명 이후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탄생했다. 시장에서 공급자(생산자)가 급증했다. 아이디어 하나만 있으면 창업할 수 있어서다. 그 바람에 시장 내에서 힘의 균형이 소비자 쪽으로 기울었다. 이 모든 현상이 최근 30년 사이에 발생한 일이다.”
지금까지 얘기를 정리하면, 디지털 시대엔 기술혁신이 필요 없다는 말인 듯하다.
"기술혁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경영자는 개발자의 시각을 버리고 소비자를 봐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기업은 고객의 눈에 별 차이 없는 기술을 개발해 혁신인 것처럼 자랑한다. 혁신의 성패는 소비자가 결정한다.”
IT혁명 이후 기술혁신이 승패를 결정하지 않았는가.
"나는 IT시대를 3단계로 구분한다. 첫 단계는 90년대 후반이다. 기존 승자 가운데 하나인 신문을 해체하는 시기였다. 내가 언번들링(Unbundling: 그래픽 참조)이라고 부른 시대다. 신문은 모든 정보를 한눈에 보여주는 매체인데, 인터넷이 뉴스를 하나씩 전했다.”
두번째 단계 특징은 무엇이었나.
"탈중개화 시대다. 이때 항공권 예매을 대행하는 여행사와 주식매매를 중개하는 증권사 등이 중개업무를 사실상 접어야 했다. 고객이 생산자나 판매자와 직접 거래하는 시대가 됐다. 이 단계도 지나 이제는 디커플링 시대에 들어섰다.”
여전히 한국 기업들은 기술혁신 쪽에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삼성과 LG 등은 베끼는 기업(copycat)이었다. 이제는 글로벌 리더가 됐다. 자리 잡은 기업이기도 하다. 수많은 스타트업의 도전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여러 차례 내게 자문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내 대답은 한결같다. ‘기술개발 못지 않게 소비자 연구에 투자하라!’였다. 한국 삼성 등은 소니 등 일본 기업들이 소비자 입장에선 의미없는 기술 개발과 완성도를 추구하다 경쟁에서 밀려난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아까 신문이 해체됐다고 했는데, 부활할 가능성은 없는가.
"너무나 많은 뉴스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독자들이 뉴스를 알기 위해 돈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이제 뉴스는 공짜 상품이다. 그 바람에 가짜 뉴스마저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 점을 신문사 경영자가 주목해야 한다. 독자라는 고객은 넘쳐나는 뉴스 가운데 무엇이 믿을만한 것인지 알고 싶어한다. 뉴스보다는 진실과 거짓을 정리해주는 신문이라면 독자들이 돈 주고 사본다.”

“디커플링은 관심경제학…소비자 관심 끄는 게 중요”

디커플링

디커플링

“내 이론이 어느 학파에 속하는지를 굳이 말한다면 관심경제(경영)학이라고 할 수 있다.”

탈레스 테이셰이라 디커플링 대표의 말이다. ‘기술혁신보다 소비자의 선택이 재계 판도를 바꾼다’는 논리를 설명하면서다. 관심경제학(Economics of Attention)은 인터넷시대 제기된 새로운 경제논리 가운데 대표적인 예다. 테이셰이라는 “1990년대 후반 인터넷 이론가 마이클 골드하버 등이 관심경제학을 처음 제기했다”고 소개했다. 당시 골드하버는 “신경제 시대의 돈은 관심”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골드하버와 테이셰이라 등은 ‘관심’은 곧 유한한 자원이라고 정의한다. 정보나 지식, 상품, 서비스는 차고 넘치지만 관심을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 바람에 경영자가 의사를 결정할 때 제품이나 서비스가 소비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관심 척도는 ‘소비자가 어떤 정보나 지식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가’이다. 테이셰이라는 “요즘 매체들이 조회수(PV) 경쟁을 벌이고 있다”며 “하지만 진정한 관심은 PV가 아니라 ‘조회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보 소비자들은 뉴스 하나에 소비하는 시간이 아주 짧다”며 “이런 의미에서 요즘 뉴스는 더 이상 상품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관심경제학은 개인이나 기업 차원을 넘어 거시경제학에도 활용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합리적 무관심(rational inattention)’이다. 경제 주체가 수많은 데이터(정보)를 분석해 판단할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합리적 무관심이란 말은 전 미국 재무장관 티머시 가이트너가 2008년 금융위기를 설명할 때 다른 의미로 썼다. 티머시는 “월가 사람들이 위기 순간 정부가 구제할 것이란 점을 알고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의 위험성에 대해 합리적으로 무관심한 바람에 위기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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