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동독 정부·반체제 인사·교회 ‘원탁회의’가 유혈사태 막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64호 13면

한스 자이델 재단과 함께하는 독일 통일 30돌 <3>

한국에서는 독일 통일의 전개 과정에 관해 축약해서 이야기할 때 흔히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시위가 시작됐던 1989년 5월 동독의 국가 권력에 맞서는 시위대의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시위대와 난민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서 작은 개울이 거대한 물줄기로 바뀌었고 이는 결국 서독과의 통일로 연결됐다. 이러한 내용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89년 5월부터 9월 사이에 거리로 나가서 동독 체제의 권력에 저항했던 대부분의 시위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시위하는 목표가 통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모드로우 정부, 폴란드 노조 본떠 #원탁회의 열어 시위 세력과 회동 #지방서도 ‘여성 회의’ 등 다수 소집 #동독 첫 민주적 방식 총선 이끌어 #주민들 ‘우리는 한 민족이다’ 구호 #체제 저항 운동이 통일 밑거름 돼

동독 시위대, 여행·결사·표현의 자유 요구

동독 주민들과 언론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한 가운데 1989년 12월에 베를린에서 개최된 ‘중앙 원탁회의’. [사진 독일 연방 자료실]

동독 주민들과 언론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한 가운데 1989년 12월에 베를린에서 개최된 ‘중앙 원탁회의’. [사진 독일 연방 자료실]

당시 시위 참가자들이 슈타지(동독 비밀경찰)의 절대 권력에 반대하고 여행과 의사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요구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때 통일을 위한 요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노이에스 포룸(Neues Forum)’이나 ‘자유 지금’ 또는 ‘평화 인권 이니셔티브’와 같은 조직들을 이끌었던 많은 시민 운동가가 처음에 원했던 것은 사회주의 체제의 개선이었다. 60년대와 70년대에 이미 로베르트 하베만이나 루돌프 바로와 같은 정권에 대한 비판자들은 마르크시즘에 기초한 동독을 비판했다.

자신의 의지에 반해 동독 정권으로부터 서독으로 추방당했던 볼프 비어만, 슈테판 하임과 같은 예술인들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동독의 체제가 더 낫다는 의식 속에 성장했던 사람들이다. 다만 이들은 ‘동독은 관료주의와 국가 공산주의의 독재 성향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제1회 원탁회의를 환영한다’라는 문구가 쓰인 현수막이 본회퍼 하우스 입구에 걸려 있다. 이 건물은 개신교 모라비아형제회에 속한 장소이며, 이곳에서 원탁회의가 열린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사진 독일 연방 자료실]

‘제1회 원탁회의를 환영한다’라는 문구가 쓰인 현수막이 본회퍼 하우스 입구에 걸려 있다. 이 건물은 개신교 모라비아형제회에 속한 장소이며, 이곳에서 원탁회의가 열린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사진 독일 연방 자료실]

저항의 초기 시점에는 인기 있는 대안으로 부상한 서독의 자유 시장경제 및 민주주의와 동독의 중앙 집중식 공산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으려는 시도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오랫동안 국가와 당을 이끌어 왔던 에리히 호네커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 서기장과 그 후임자인 에곤 크렌츠가 사임하고 난 직후인 89년 11월에 대두한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두 동독 책임자의 사임 이후 자리를 이어받은 한스 모드로우에 계속 반대를 해야 할지, 아니면 협력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독일은 과거에 활동 금지를 당했던 폴란드의 자유노조연대가 공산정권과 담판을 벌였던 사례를 참고했다. 89년 2월부터 4월 사이에 폴란드에서는 정부와 반공산주의 진영 그리고 교회와 다른 그룹들이 함께 모여 ‘원탁회의’를 매우 성공적으로 구성하여 새로운 헌법 제정을 모색했다. 이를 통해 민주주로의 원만하고 평화로운 이행이 가능했다. 원탁회의를 함으로써 이에 참가하는 모든 그룹은 동등한 자격을 지녔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표명하였으며 57명이 둘러앉았던 이 원형탁자는 지금도 여전히 폴란드 대통령궁에 보관돼 있다.

한스 모드로우 전 동독 총리. [중앙포토]

한스 모드로우 전 동독 총리. [중앙포토]

베를린에 거주하는 동독 반체제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민주주의 지금(Demoktatie Jetzt)’이 주도해 동독에서는 ‘중앙 원탁회의’(독일의 경우에 탁자의 실제 모양은 원형이 아닌 사각형이었다)가 시작됐다.

모드로우 정부는 원탁회의에서 반체제 인사들 그리고 교회 관계자들과 만났는데, 첫 회동은 89년 12월 개신교 모라비아형제회의 본회퍼 하우스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는데, 강력한 권한을 지닌 동독의 국가 지도부가 이전까지 적대시하던 교회를 찾아서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지방 차원에서도 다수의 원탁회의들이 소집되었는데 ‘여성 원탁회의’ 그리고 ‘스포츠 원탁회의’ 등이다. 이렇게 생겨난 원탁회의들은 90년 3월에 실시했던 동독 최초의 민주적 방식의 총선과 90년 5월의 지방선거와 관련해 활동했다.

체제 다른 남북한 화합 방법 고민해 봐야

폴란드 대통령궁 안에 보존된 원탁회의. [사진 Creative Commons CC-BY-SA-3.0-PL]

폴란드 대통령궁 안에 보존된 원탁회의. [사진 Creative Commons CC-BY-SA-3.0-PL]

원탁회의들의 입장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슈타지의 축소 문제였으며 이 밖에도 또 다른 희망 사항들이 존재했는데, 예를 들면 한 워킹그룹은 서독뿐만 아니라 당시에 사회주의 게릴라들이 권력을 잡고 있던 니카라과나 스페인 등의 사례들을 참고해 헌법 초안 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러는 동안에 동독 주민들은 거리에서 시위를 이어 나갔으며, ‘우리는 시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가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라는 구호로 바뀌면서 통일은 더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됐다.

90년 3월에 실시된 동독 총선의 결과를 통해 동독 주민들이 서독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조속한 통일을 원하는 것으로 윤곽이 드러나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입장은 지지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한국에서도 완전히 다른 체제인 남북한이 어떻게 하면 서로가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고 화합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에 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원탁회의를 통해 대화하고 경청했던 것은 독일이 유혈사태 없이 서로 접근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지속적인 해법은 아니었다. 결국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대 계획경제와 공산주의로 대별되는 두 체제는 물과 불처럼 섞이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계속>

※ 번역 : 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