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벅지 만지며 추행 뒤 "순수한 사랑"···그녀는 대자보 붙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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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에 다니는 A씨는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 5년 전 끔찍한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마주치는 것조차 싫어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에 가게 만들었던 선배 B씨와 같은 수업을 듣게 된 것이다.

A씨는 입학한 지 한 달 남짓 된 신입생 시절 B씨를 알게 됐다. 학술답사 술자리에서 그는 A씨에게 “옆자리로 오라”고 요구하고, 거절하자 직접 A씨 옆자리에 앉아 허벅지를 만지며 성추행했다. 이후에도 B씨는 “집에 데려다주겠다” “시험공부를 도와주겠다”며 A씨를 쫓아다녔다. A씨가 거절해도 소용없었다. A씨가 듣는 수업에 몰래 들어와 어느새 옆자리에 앉기도 했다. A씨는 “신입생에게 선배인 B씨는 너무나 무서운 존재였다”며 “학과활동도 할 수 없었고,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다”고 말했다.

건국대에 붙은 성폭력 관련 대자보와 이를 지지하는 스티커들. [사진 건국대 학생회 성폭력 대책위]

건국대에 붙은 성폭력 관련 대자보와 이를 지지하는 스티커들. [사진 건국대 학생회 성폭력 대책위]

5년이 흘렀지만 B씨의 얼굴을 보자 A씨는 당시의 수치심이 생생하게 떠올랐다고 했다. A씨는 용기 내 “나에게 사과하고, 내가 당신을 피해 다닌 만큼 남은 한 학기 만이라도 나를 피해 다녀라”라고 요구했다. B씨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하지만 “순수한 사랑을 했을 뿐”이라며 “바람직하지 못했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모호한 표현만 전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학과 생활을 이어갔다. 참다못한 A씨는 11일 ‘2014년의 일을 2019년에 맺고자 쓴 글’이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이고 성추행 피해를 폭로했다.

대자보의 반응은 뜨거웠다. 다음날 같은 과 학생들은 대자보에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연대합니다’라는 내용의 포스트잇을 붙여 A씨를 응원했다. 17일에는 11~19학번 학우 70여명이 “너무 늦게 알게 되어 더 많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A씨와 연대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과 전체 학생 중 절반이 넘는 인원이다.

이후 과 학생회와 교수진, 일반 학우들로 이뤄진 성폭력 임시 특별기구(TF)가 만들어졌다. 일부 학생은 A씨의 요구에도 계속 같은 수업을 듣는 B씨에 대한 항의 표시로 “만졌지만, 추행은 아니라뇨?” “더는 보고 싶지 않음” 등의 스티커를 강의실에 붙여놓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로써는 B씨를 강제로 수업에 들어오지 못 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TF 측은 “교직원과 학생 사이에 벌어진 성폭력이 아닌 학생 간 성폭력에 대한 대처 매뉴얼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과 교수진은 B씨에게 도서관과 단과대 건물의 출입금지를 ‘권고’했다고 TF는 전했다.

A씨는 B씨를 고소할 예정이다. A씨는 “처음에는 처벌을 원하지도,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며 “그저 B씨가 반성하고, 내가 그를 피해 다닐 때의 고통을 똑같이 겪길 바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B씨의 달라지지 않는 모습에 마음이 달라졌다. A씨는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B씨 같은 사람은 똑같은 일을 벌일 수 있으니 미래에 발생할지 모를 피해자를 위해 고소를 진행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듣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A씨는 자기 일을 계기로 선후배 간 위계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본 후배들이 명확한 제도를 통해 가해자의 처벌을 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건 다 옛말”이라며 “10번 찍으면 사람 다쳐요”라고 덧붙였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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