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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동북아 약자, 유연해야 살아남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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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3호 20면

최명길 평전

최명길 평전

최명길 평전
한명기 지음
보리출판사

베스트셀러 『병자호란』 저자 #평전 통해 최명길 외교력 분석 #한국은 10등 학생, 주변국 1~4등 #지소미아 헛발질 반복 안 돼

‘역사는 반복된다.’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 명제다. 사실의 바탕 위에서 과연 그런지 따져보는 게 역사학자들이 하는 일이다.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57) 교수는 조선 중기의 역사를 가지고 그 일을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명제 증명 말이다. 1636년 병자호란 연구가 그의 전문 분야다. ‘역사평설’이라는 단서를 붙인 두 권짜리 『병자호란』(2013년 출간)이 지금까지 6만 부나 팔렸다.

한 교수가 이번에는 최명길(1586 ~1647)을 끌어냈다. 600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 줄잡아 100건이 넘는 참고문헌 목록을 덧붙인 『최명길 평전』이다. 최명길은 물론 병자호란와 관련 있다.

사실 최명길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과거 TV 드라마, 가깝게는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 등에서 숱하게 봐왔다. 시대의 이단아, 당대의 변절자 이미지가 강하다. 조선시대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의 명분을 뒤로하고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와 타협했다. 남한산성의 인조를 설득해 항복 국서를 썼다. 지금 시각에서는 정당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당대에는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한 교수는 이번 평전에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최명길의 편지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디테일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고 했다.

28일 인터뷰에서다. “그렇게 복원해 놓고 보니 최명길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빼어난 외교관 중 하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평했다.

명지대 한명기 교수는 조선시대 병자호란 전문가다. 당대의 재사 최명길의 외교술을 평전을 써서 분석했다. 신인섭 기자

명지대 한명기 교수는 조선시대 병자호란 전문가다. 당대의 재사 최명길의 외교술을 평전을 써서 분석했다. 신인섭 기자

한 교수는 박엽 얘기를 꺼냈다. 박엽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추대한 공신 세력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전 정권’ 사람이었다. 평안도 지역의 빼어난 장수였지만 사납고 탐욕스러웠던 인물로 평가된다. 최명길이 공신 세력이었으면서도 그런 박엽을 살려두자고 했다는 얘기였다.

왜 박엽을 살려두자고 했던 건가.
“정권 차원에서는 죽여 마땅하지만 국가 안보 차원에서는 살려둬야 한다고 봤다. 평안도에서만 10년가량 근무해 훗날 청나라가 되는 후금과의 교섭 능력과 경험, 네트워크 등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구명운동은 실패하고 박엽은 처형당한다. 결국 나중에 어떻게 됐나. 병자호란이 임박하자 박엽 같은 장수가 없어 아쉽다는 얘기가 나온다. 작은 나라가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나마 유능한 자원들을 총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 조선은 일종의 진영 논리에 빠져 그렇게 하지 못했던 거다. 전략적으로 인재를 키우지 못했다. 이런 문제가 조선에만 해당된다고 보지 않는다. 요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한 교수는 병자호란이 터지기 전인 1636년 여름의 일화도 소개했다. 명나라 감군 황손무가 조선을 찾는다. 감군은 지금의 국방차관쯤 되는 직책이다. 황손무가 방문한 목적은 조선을 채근해 후금을 공격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을 둘러보고 생각이 바뀐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고려해 후금을 형의 나라로 모시는 관계를 끊지는 말라고 조선에 충고한다. 조선이 후금을 상대할 여력이 없고, 그저 존립하는 것만으로 장차 명을 치려는 후금의 배후에서 견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도 척화파는 후금에 대한 항전을 주장했다. 그만큼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한 교수는 “하지만 최명길은 황손무의 의중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고 했다. “구구한 의리를 지키려다 천하의 대계를 그르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내용의 편지를 황손무에 보낸 게 근거다.

굉장한 실리주의자였던 것 같다.
“‘선택적 원칙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명길이 명나라를 끝내 저버린 것은 아니다. 병자호란 이후 명과 내통하다 발각돼 심양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명분보다 나라와 백성의 생존을 우선시했다. 일종의 전략적 유연함이었다. 지금 한국도 그렇지만 조선과 같은 조건에서 그런 유연함이 없으면 생존이 어려웠다.”
최명길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가까운 친구였던 장유 등을 통해 양명학을 접했고, 광해군 대에 관직에서 쫓겨나자 주역을 무려 4000번을 읽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동시대 성리학자들의 시국관이나 대외인식과 다른 생각을 품게 됐던 것 같다. 주역은 결국 우주의 본질을 따져 앞날을 대비하자는 학문 아닌가. 당장 시국이 어떻게 전개될지가 눈에 보여 자신의 돌출 행동에 확신을 가졌다고 할까. 양명학은 누구나 지혜의 원천인 ‘양지’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고 본다. 청나라가 오랑캐 국가라고 편협하게 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최명길의 지혜를 가령 요즘 우리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까.
“과거나 역사의 교훈을 지금 현실에 단순 대입하는 일은 섣부르거나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다만 최명길의 유연함, 견고한 현실 인식은 지금 우리에게도 값지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 사이에 끼어 있다 보니 한쪽하고 관계가 좋지 않으면 다른 한쪽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거나 최소한 현상 유지는 해야 한다. 그런 패턴이 우리 역사 전체를 관통해왔다고 할 수 있다. 학교 교실에 비유하면 과거 조선과 달리 지금 한국은 반에서 10등 정도는 하는 학생이 됐다. 문제는 우리 주변이 그야말로 1, 2, 3, 4등 하는 나라들이라는 점이다. 일본을 대할 때 한국의 고민은 현실적으로 국력이 여러 분야에서 뒤지는데도 불구하고 체면은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약자가 실리와 명분 모두를 챙기는 방법은 뭘까. 적절한 타이밍에 타협을 잘하는 거다. 최명길의 조선은 그 일을 해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한국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사례를 들 수 있나.
“당장 일본과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문제만 해도 그렇다. 미·중 갈등으로 어지러운데 전선을 넓히지 말았어야 했다. 이달 초 태국 방콕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의 아베 총리에게 취한 유화적인 모습은 사실 진작에 나왔어야 했다. 한국 정부가 뭔가 원칙에 입각해 일본을 상대하려다 결국 원칙마저 지키지 못하게 된 꼴 아닌가.”
비슷한 실책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굉장히 예민해져야 한다. 주변국,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철저하게 살펴야 한다. 그다음 유연하고 포용력 있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노회할 정도로 전략적이어야 한다. 현재 갈등 중인 미·중 모두와 잘 지낼 수 있으면 최상이겠지만 결정적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몰릴 수도 있다. 그럴 때 어떻게 할 텐가. 박쥐처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할 것인가. 뭔가 원칙을 세워 공표한 다음 우리 길을 가되 하다가 안 되면 제3의 길을 찾든가 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게 가능할까.
“지금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 아닌가. 대외 정책의 원칙들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촛불의 경험도 있지 않나. 그래야 최선이 아니라 차선 혹은 차악의 대외정책이라도 선택할 수 있다고 본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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