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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재현의 시선

칼집 잡을 땐 칼날 쥘 준비도 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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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박재현 논설위원

박재현 논설위원

판결문에 적시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범죄 사실은 구차했다. 1심 재판부의 무죄 선고는 법률적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그는 이미 사회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의 인생은 성매수와 뇌물의 감옥에 갇혀버렸다. 남은 재판의 결과도 그에겐 형식 절차에 그칠지도 모른다.

김학의 사건 통해 정의 실현됐나 #검찰, 선거개입 수사 명운 걸어야 #일방적 통치, 국민 저항 부를 수도

“7차례의 성범죄와 5회에 걸친 금품 수수, 1천만원 짜리 그림과 2백만원 짜리 코트를 윤중천에게서 받았다”는 수사팀의 공소 내용은 지워질 수 없는 낙인이 됐다. 또 다른 업자 두 명에게서 받은 상품권과 현금, 법인카드 사용 기록 등이 일목요연하게 담긴 범죄 일람표는 그의 삶을 하찮게 만들어버렸다. 하얀 마스크 사이로 성성하게 자란 흰 수염만큼 그의 처지는 비루해지고 있었다. 무죄 선고 이후에도 아무도 그에게 결백함이 입증됐다고 거들지 않고 있다.

그에 대한 세 번의 수사와 한 차례 재판을 통해 우리의 정의는 입증됐을까.

지난 3월 “검경 지도부는 명운을 걸고 철저히 진상 조사를 하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지시를 검찰은 철저하게 따랐다. 작금의 ‘검찰 개혁’이라는 화두가 무색할 만큼 말이다. 수사팀은 ‘사회 특권층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말하지 못한다’는 말을 받들어 김학의를 탈탈 털었다. 별건 수사와 인권 침해라는 비판은 적폐세력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검찰 조직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그를 엮어 넣어야만 했다. 10년의 공소시효를 깨기 위해 죽은 사람까지 뇌물 공여자로 불러들였다. 초혼(招魂)이 별건가.

1심 재판부는 어떤가.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집권층과 대중들의 눈치를 봤다. “공소시효가 지났고, 일부는 당사자의 사망으로 범죄혐의 입증이 어렵고….” 법원의 판결문은 소상하고 친절했다. 성매수와 관련된 동영상 인물에 대한 판단도 내놓았다.

검찰이 당초 기소한 성범죄와 뇌물사건은 온데간데없고, 유탄을 맞은 윤중천만 별건의 횡령 혐의로 5년 6월의 중형을 맞았다. 범죄가 있는 곳에 처벌이 있어야 하지만 이런 식의 수사와 재판에 과연 동의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문제 제기는 적폐이고 토착왜구 세력의 불만인가.

국가와 정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을 보호하는 데 있다. 법과 제도는 선량한 다수의 시민을 위한 부득이한 통제 권한이다. 하지만 그 권한은 절제되고 공평해야 한다. 이 정부가 즐겨 쓰는 민주적 통제는 나와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너와 당신들을 위한 것도 필수요소다. 그래야 결과에 대한 승복과 반성이 뒤따라올 수 있다.

노자에 나오는 ‘치대국(治大國) 약팽소선(若烹小鮮)’의 의미를 살펴보자. 나라를 다스릴 때는 작은 생선을 삶듯이 해라. 작은 생선을 삶을 때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 살은 온데간데없고 다 부스러질 것이다. 나라의 운영도 그렇지 않은가. 쓸데없이 숟가락이나 젓가락으로 찔러대면 생선은 제대로 삶아지지 않을 것이다.

통치권자가 특정 세력이, 특정 인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식으로 법률적 판단까지 하면 민주주의의 기본인 삼권분립은 설 자리를 잃고 만다. 김학의에 대한 추상같은 지시 배경에는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까.

문 대통령은 수사 지시 때 “국민들이 보기에 대단히 강한 의혹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은폐된 사건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사회 특권층에서 일어난 일이고, 검찰과 경찰의 수사기관들이 고의적인 부실수사를 하거나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진실규명을 가로막고 비호·은폐한 정황들이 보인다”고도 했다.

칼집을 잡을 때는 칼날을 쥘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조국 패밀리 사건, 유재수 전 부산 부시장 감찰 무마, 황운하 전 울산경찰청장 선거 개입 등이 기해년 말미를 어지럽히고 있다. 국민들은 이런 사건들에 대단히 강한 의혹을 갖고 있다. 사회 특권층에서 일어났고, 수사기관들의 비호와 은폐 정황도 나타나고 있다. 검찰 개혁을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하나.

검찰에서 감찰을 총지휘했던 한 변호사의 말. “김영삼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가족들이 모두 조사를 받았고, 심지어 본인도 처벌 대상이 됐다. 하지만 아무도 수사와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염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누구나 ‘김학의’가 될 수 있는 것은 실질적 법치주의라 할 수 없다. 보편적 가치를 넘어서는 통치행위로 국민적 저항이란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을 벌써 잊었을까.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