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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재정관리 ‘고무줄 원칙’ 만들겠다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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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김도년 기자

김도년 기자

지난달 23일만 해도 기획재정부는 국정감사에서 나라 곳간을 건전하게 관리하기 위한 기준인 ‘재정준칙’의 법제화 필요성을 묻는 말에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통상 이런 정부 답변은 “검토하지 않겠다”는 말과 동의어다. 그러나 최근 달라진 분위기가 감지됐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2023년 이후 급격히 국가채무가 는다면 재정준칙 설정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달 사이에 정부 기류가 180도로 달라진 것일까. 최근 기재부 보도자료를 살펴보면 몇 가지 단서가 붙어 있다. ‘한국적 상황’에 맞는 ‘유연한’ 재정준칙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준칙’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 ‘기준이 되는 규칙이나 원칙’을 말한다.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이란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기획재정부가 밝힌 재정준칙 앞에 붙은 ‘유연한’이란 수식어는 ‘뜨거운 아이스크림’처럼 애당초 형용모순이다. 기재부는 왜 이런 표현을 쓴 것일까. 익명을 요구한 기재부 고위 관계자는 “재정 관리 마지노선을 법이 아니라 ‘원칙’ 정도로 정하자는 것”이라며 “준칙도 마지노선에 집착할 게 아니라 국가채무·재정적자 증가율을 관리하는 방식 등 다양하게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국회 계류 중인 재정건전화법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45%로,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3%’로 관리하는 게 핵심이지만, 이런 방식과는 다르게 운용하겠다는 의미다.

법은 한번 만들면 고치기 어렵기 때문에 재정준칙을 법에 못 박지 않는 것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재정준칙을 유연하게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정부 설명대로 지금의 ‘한국적 상황’은 저출산·고령화로 재정 지출이 급증할 위험을 앞두고 있다. 통일 비용 지출에도 대비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재정준칙’이란 단어 앞에는 ‘엄격한’이란 수식어가 어울릴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재정 관리 목표를 2014년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30%대 중반’에서 이듬해엔 ‘40%대 초반’, 올해에는 ‘40%대 중반’으로 수정했다. 이런 ‘고무줄’ 재정 관리의 병폐를 해결하려고 준칙을 세우는 것임을 정부는 분명히 해야 한다. 재정 전문가인 옥동석 인천대 무역학과 교수는 “참여정부 때는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1% 이내에서 관리하겠다는 준칙을 세우고, 정부도 이를 지켰다”며 “엄격한 재정준칙과 함께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는 독립적인 재정기구 마련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도년 경제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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