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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재현의 시선

전 정권에 책임 미루고, 언론 탓한 다음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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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박재현 논설위원

박재현 논설위원

“검사님, 공산주의 국가에선 지도자들이 어떻게 정치적 위기를 극복했는지 아십니까?”

볼셰비키 지침과 묘하게 일치 #교만·술수로 민심 맞서면 험한 꼴 #정책 내팽개친 채 끝나선 곤란

1995년 12월. 뇌물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보강 조사를 위해 구치소를 찾은 검사들과 차를 마시면서다.

“글쎄요. 뭐 특별한 비결이 있었습니까.”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 때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어요. 일종의 분위기 전환용으로 전설처럼 내려오던 조크 아닌 조크를 하더라고요.”

전직 대통령으로는 헌정 사상 처음 구속된 그의 말 속엔 김영삼 정부를 향한 섭섭함이 묻어 있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취임과 함께 세 개의 봉투를 받는다고 합니다. 위기에 대비한 일종의 지침서죠. 첫째 봉투에는 ‘전(前) 정부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문민정부가 추진한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이뤄진 자신과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이 정치적 목적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당시 정치권에선 YS가 자신을 둘러싼 불법 대선자금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전 정권을 끌어들여 사법처리를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22년 뒤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어떤가. 촛불정권과 내로남불이란 부조화가 특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정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잘못은 없다. 경제 실적이 부진한 것은 전 정부에서 비롯된 것이고, 20대가 정치적 불만을 갖게 된 것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탓이다. 내년도 경기 전망이 흐린 것도 보수 정당인 자유한국당이 협조를 안 해주기 때문이다. 국회 예결위가 정무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정무수석 때문에 파행을 겪는데도 야당 탓만 하고 있다. “최근 발생한 성북구 일가족 사망 사건 같은 비극적 일들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도 예산 심의가 필요하고…”라는 대목에선 정치적 교만과 술수가 느껴진다.

정권 출범 후 2년 반 동안 적폐수사에 올인하다가 또다시 세월호 특별수사단이 출범한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검찰과 국회, 감사원, 두 차례에 걸친 특별조사위원회의 수사와 조사로는 미진했다는 말인가. 조국 전 법무장관 일가에 대한 수사로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또다시 적폐청산이란 카드를 꺼내 든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검찰을 통해 기계적으로 여야의 정치적 피해 규모를 맞추겠다는 의도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검찰 개혁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는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를 묻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두 번째 봉투에는 뭐라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까?” 노 전 대통령은 “언론을 탓하고 원망해라 입니다”고 설명했다.

조국 스캔들 이후 문 대통령은 유감 표명은 짧게, 언론 탓은 장황하게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유시민씨, 그리고 친정부 매체들의 언론 때리기는 스탈린, 흐루쇼프 때 있었던 언론 개혁 운동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러시아 혁명과 때를 같이해 적군과 백군의 내전이 거셀 때 언론은 정파적 목적에 따라 증오와 통제의 대상에 불과했다. 우리가 지금 혁명을 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조국 사태로 인해 사실상 내전 상태에 들어간 것인가.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 회의실에서 공손히 받아적기를 마친 검사 출신의 법무부 간부들이 주도했던 언론 관련 대책은 영혼이 없는 사람들이 칼을 쥐었을 때의 부작용을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이들에겐 조직을 지킬 수 있는 배짱도 없었다. 야당 의원의 “시정하겠느냐”는 호통에 즉각적으로 나온 “예”라는 대답 속엔 법무부 수장으로서의 위엄과 품위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대통령 딸의 소식을 풍문으로 전해 듣고, 미국·일본 당국의 발표와는 전혀 상반된 브리핑을 받아 적어야만 하는 것이 오늘 언론의 현실이다.

그럼 볼셰비키 지침 세 번째는 뭐였을까. “전 정부에게 책임을 미룰 수도 없고, 언론 탓도 안되면…‘줄행랑을 쳐라’였다고 합니다.”

노 전 대통령이 잠시 뜸을 들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엔 모처럼 옅은 미소가 흘렀다고 한다. 소득주도성장 정책도 안되고, 최저 임금제와 주 52시간 근무제가 갈팡질팡하는 사이 강남의 부동산은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모든 것을 내팽개친 채 정권이 끝나는 건 아닐까. 국회에 나와 호통을 치는 정무수석, 소통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홍보수석, 인선 기준도 제대로 설명 못 하는 인사수석, 야당 의원들과 싸우자고 달려드는 비서실장은 정권이 끝나고 어디로 향할까. 어떤 봉투가 전설처럼 전해질까.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