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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안 거치고 늘어나는 ‘기업 길들이기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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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정부가 국회 견제를 피하기 위해 시행령 개정을 통해 ‘기업 옥죄기’에 나서는 경우가 늘고 있다. 재계에서는 과잉입법일 뿐 아니라 위헌 소지가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민연금, 기업경영 참여 확대 등 #정부 입법 대신 시행령 고쳐 추진 #재계 “사기업 통제 위헌 소지” 반발 #“국회 역할 못해 대안없다” 반론도

28일 기획재정부와 재계에 따르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정부가 입법예고한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을 철회해 달라는 의견을 최근 정부에 제출했다. 현행법은 단순투자 목적으로 5% 이상 지분을 가진 주주가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그런데 시행령 개정안은 공적 연기금이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정관 변경을 추진하는 경우에는 ‘경영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게 아닌 것’으로 분류했다. 경총은 개정안이 정관 변경을 ‘경영권 영향 사항’이라고 못 박고 있는 상위법과 충돌한다고 주장한다. 경총은 “국민연금을 통해 정부·시민단체·정치권 등이 기업경영에 간섭·규제하는 이른바 ‘기업 길들이기’의 길을 확대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입법 대신 시행령·고시 개정으로 이뤄지는 주요 조치. 그래픽=신재민 기자

입법 대신 시행령·고시 개정으로 이뤄지는 주요 조치. 그래픽=신재민 기자

한국경제연구원은 상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정부에 전달했다. 사외이사 재직기간을 해당 회사 6년으로 제한하고 이사·감사 후보자의 개인정보 공개를 의무화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한경연은 직업선택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자 과잉금지원칙에 반하는 위헌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경연은 “결국 이사회 구성원의 인력풀을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해 전문성이 떨어지는 이사의 비중이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입법예고한 공정거래법 시행령 및 기업집단 현황공시 개정안도 논란이다. 김종석 의원(자유한국당)에 따르면 지난 6년간 공정위의 시행령 개정 등 하위법령 개정 가운데 규제를 강화하는 비율이 2015년 규제완화의 1.4배에서 지난해 5배로 증가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외에도 법률을 위반한 기업인을 전 직장으로 복귀하지 못하게 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시행령의 경우는 엄연히 자격 정지에 해당하는 형벌”이라며 “형벌은 사법부가 법에 근거해 내리는 것이어서 행정부가 시행령으로 강제하면 헌법정신인 삼권분립을 위반하는 것이 된다”고 지적했다.

불안감이 커진 재계에서는 헌법소원까지 검토하고 있을 정도로 반발이 크다. 그럼에도 정부가 시행령 개정을 통해 밀어붙이는 것은 현 정부의 정책 방향을 달성하기 위해서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부터 국민연금의 이른바 스튜어드십코드 강화를 주장해왔고, 대기업 총수의 전횡을 견제하겠다는 견해를 피력해왔다.

이 밖에도 민간택지 아파트에 대한 분양가상한제 적용, 자사고·외국어고·국제고 폐지 등에서 정부가 야당의 반대를 피하며 정책을 펼쳐나가는 수단으로 시행령을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시행령으로 기업을 강제하는 경우가 많아지면 자유시장 경제 원칙을 침해하게 된다”며 “특히 헌법 126조는 천재지변 등 긴급한 사안을 제외하고는 사영기업의 경영을 국가가 통제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어 위헌의 소지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회적 갈등을 해결해야 할 국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 철학에 맞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재량 범위 내에서 시행령을 먼저 도입하면, 향후 잘못된 점을 보완해 입법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스튜어드십 코드의 경우 주주가 위임한 경영권을 스스로 감시·감독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손해용·허정원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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